[공연]갈 데까지 가보자, 세상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 입력 2009년 9월 28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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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방바닥 긁는 남자’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를 펼친 4명의 젊은 배우. 왼쪽부터 홍민수 조승희 김철영 김호윤 씨. 사진 제공 연희단거리패
연극 ‘방바닥 긁는 남자’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를 펼친 4명의 젊은 배우. 왼쪽부터 홍민수 조승희 김철영 김호윤 씨. 사진 제공 연희단거리패
연극 ‘방바닥 긁는 남자’

이토록 후각을 자극한 연극이 있었던가 싶다. 비단 공연이 끝난 뒤 극장 안에 진동하는 자장면 냄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극 자체가 뿜어내는 비릿한 냄새, 날것의 냄새 때문이었다.

그만큼 극과 관객을 차갑게 분리하는 영상문법에 익숙한 관객에겐 불편한 연극이다. 땟물이 시커멓게 말라붙은 얼굴의 사내 넷이 두 평 남짓한 비좁은 방 안을 굴러다니며 온갖 지저분한 난장을 펼친다. 신문지로 세수를 하고, 잠자는 이의 입에 발가락을 집어넣고, 속옷을 서로 빼앗아 입는다. 끝내는 엎어진 자장면을 주워 먹느라 아귀다툼을 펼치다 자장범벅이 되고 만다.

지난해 발표한 4시간 반짜리 서사극 ‘원전유서’로 동아연극상 대상과 희곡상을 수상한 김지훈 작가의 신작 ‘방바닥 긁는 남자’(이윤주 연출)의 공연 풍경이다. 처음엔 TV에서 봐 온 자학개그를 볼 때처럼 불편한 웃음만 나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디 한번 갈 데까지 가보자는 작가의 도저(到底)한 세계관에 점차 빨려 들어가게 된다.

재개발이 예정돼 주민이 모두 빠져나간 동네 낡은 단칸방에 사내 4명이 모여 산다. 그들은 방 밖으로 나가길 거부하고 비좁은 방 안에서 하루 19시간을 잠에 빠져 지낸다. 설거지는 한 달에 한 번, 속옷은 3년에 한 번 갈아입으며 게으름의 한계에 도전한다.

깨어 있을 때 그들이 하는 일은 식욕을 채우는 일과 머리 크기로 서열을 정해 치졸한 권력투쟁을 펼치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궤변을 펼치는 것이다. 방바닥에 납작 붙어사는 그들은 ‘누룽지 인간’을 자처한다.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됨이 전혀 사람답지 못하고 사람이란 말을 붙이는 게 영 어색한 사람”이다.

이들 누룽지 인간은 양날의 칼이다. 첫 번째 칼날은 그들이 한사코 나가길 거부하는 바깥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그 순간 좁은 방바닥은 돈의 노예가 되고 권력투쟁에 골몰하는 현실의 복사판이 된다. 두 번째 칼날은 달팽이처럼 자신만의 세계에만 갇힌 채 현실도피에 빠진 요즘 젊은 세대에 대한 풍자다. 좁은 방바닥에 한국의 비루한 현실을 투영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의 1인용 폐쇄공간을 통해 일본사회의 일그러진 초상을 담아낸 사카테 요지의 연극 ‘다락방’을 닮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고도로 양식화된 ‘다락방’과 달리 철저히 밑바닥을 구르겠다는 패기가 넘친다. 연극이 끝날 때 완전히 무너져 내린 단칸방을 벗어나 따가운 햇살 아래 선 누룽지 인간들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진다. 10월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게릴라극장. 02-763-1268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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