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감독 ‘8월의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너무 완벽해 포기
청춘멜로 많이 못한 것 후회… 시행착오 겪고 용기 얻어
허진호 감독의 영화 ‘호우시절’(10월 8일 개봉)은 배우 정우성(36)의 눈가 잔주름이 보이기 시작하는 영화다. 그가 맡은 배역 ‘박동하’는 건설 중장비회사의 팀장.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에 수수한 양복차림, 출장 수당을 슬쩍 높여 적는 일상 속의 동하는 이제껏 보아온 그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그동안 영화 속 정우성은 반항아(‘비트’)거나 고독한 킬러(‘데이지’), 멋진 놈(‘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었다.
25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만난 그는 “일상다운 일상에 대한 갈증을 연기로 채워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데뷔 후 남들과 같은 삶에서 멀어졌어요. 30대 후반이 됐고 배우와 개인으로서 나를 생각하게 됐죠. 삶을 돌아보니 평범한 일상은 아니더군요. 때론 남 의식 안 하고 마음껏 돌아다닌다고도 했지만, 그래봤자 연예인이 지나다녀도 아무렇지 않은 이곳(청담동) 언저리였죠. 뭔가 제대로 된 일상이 그리웠어요. 그때 이 시나리오를 읽었어요.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며 말을 거는 것 같았죠.”
정우성은 그동안 품에 비해 배역이라는 옷이 크면 장고(長考)에 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놓친 역할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다. 그는 “모든 게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내가 들어가면 완벽함이 깨질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이후 ‘봄날은 간다’의 출연 제의도 받았지만 무릎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 놓쳤다.
“아쉬울 때도 있죠. 20대의 나를 돌아보며 ‘청춘멜로를 더 했어야 했어. 왜 그렇게도 생각이 많았니’라는 후회도 했고요.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고 나니 예전 같으면 감히 못했을 캐릭터에 나를 던질 용기도 나네요. 이번처럼요.”
이번 영화에서 그는 처음 영어 대사를 시도했다. 멋 부리지 않은 영어 발음처럼 어깨에도 힘을 뺐다. 가끔 헛웃음을 짓거나 혼잣말 하는 대목에선 동하가 아닌 정우성이 스쳐 지나간다. 그는 “영화를 본 주위 사람들도 ‘평소 네 모습이 많이 보인다’고 하더라”고 했다.
그러나 스타 정우성의 이미지를 지우기란 쉽지 않다. 이 영화에서 그가 카메라를 멘 모습은 카메라 CF를, 늘어진 면 티셔츠를 입고 술이 덜 깨 비척거리는 모습은 의류브랜드 화보를 연상시킨다. “(그 고정된 이미지가) 배우로서 넘어야 할 벽이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대뜸 “감사하다”고 답했다.
“사상과 가치관을 물으면 설득이나 반박을 하겠죠. 하지만 대중이 나를 보고 떠올리는 이미지를 어떻게 하겠어요.” 그는 장난스럽게 두 팔을 벌려 후광 모양을 그리더니 “아름다운 죄”라며 웃었다.
1994년 영화 ‘구미호’로 데뷔한 지 15년. 올해로 서른여섯 살이다. 1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 내내 조곤조곤 말하던 그도 눈가 잔주름을 언급하는 대목에선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생물학적인 나이? 신경 쓰지 않아요.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그에 걸맞은 자아를 키워나가는 게 중요하죠. 그래도 저 오늘, 여중생한테 ‘오빠’라는 소리 들었는걸요. 뭐.”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 영화 ‘호우시절’은…
유학시절 친구와 재회 그린 멜로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를 만든 허진호 감독의 다섯 번째 멜로. 중국 청두에 지진피해 복구 작업을 하러 간 동하는 미국 유학 시절 친구였던 메이(가오위안위안)와 재회한다. 다시 만난 인연에 설레는 감정, 지진의 상처를 하나씩 치유하는 모습을 밝은 분위기로 그렸다. ‘청두의 과거, 현재, 미래를 그린 ‘청두, 사랑해’라는 단편 3부작 중 하나로 기획했다가 장편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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