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부터 50~100년 단위 다시 제작
‘숭유억불’영향 원본 염주 빼고 그리기도
복사 기술이 없던 조선시대, 조상의 초상화를 어떻게 보존했을까. 그 방법 중 하나가 원본을 그대로 옮겨 그리는 이모(移摹) 작업이다.
경북 성주(星州) 이씨 집안은 최근 대물림해 온 조상의 초상화 27점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집안의 파조(派祖)인 13세기 문신 이장경과 ‘이화에 월백하고…’라는 시조를 지은 이조년(1269∼1343) 등 고려 말 조선 초의 공신과 관료 14명. 이 초상화들은 모두 18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제작 시기로 보면 원본을 모사한 이모본(移摹本)들이다. 가장 많은 이모본의 인물은 이장경으로 모두 4점이며 그 외에는 인물당 2, 3점이 남아 있다.
이번에 기탁한 초상화는 한 집안에서 나온 것으로는 최대 규모다. 한 그림의 이모본이 여러 점 있는 데다 원본과 이모본의 제작연도가 기록돼 있다. 원본은 모두 소실됐다.
“유상(遺像)을 우러러 바라보니 먼지에 그을리고 좀이 먹어 적색과 백색이 흐릿하여 분별되지 않고….”
1615년(광해군 7년) 성주 이씨 집안의 11세손 이욱은 조상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경북 성주의 안봉사 안산영당에 들른 뒤 이 글을 남긴다. 고려 말 조선 초에 그려진 초상화는 250∼300년이 흐른 17세기 초 당시에는 상당히 퇴색한 상태였다. 임진왜란 때 초상화를 보관하던 영당은 불타버렸고 한 승려가 초상화만 땅에 묻어 간신히 보존했다.
이 집안의 첫 이모 작업은 1655년에 이뤄졌다. 현재 1655년의 첫 이모본과 원본은 모두 유실됐으나 이후 50년에서 100년 단위로 남긴 다른 이모본의 상당수가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들 이모본은 시대의 변화를 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그림이 고려 말인 14세기 문신 이포의 초상화. 1714년 이모본에는 손에 쥐고 있는 염주를 먹으로 지운 흔적이 있다. 조선의 배불정책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등장한 1746년 이모본에는 관복을 검은색으로 칠했다가, 1825년 이모본에서는 염주를 쥔 손을 허리띠를 쥔 것처럼 자연스럽게 처리했다. 고려 말 이조년 초상화의 경우 염주가 그려져 있어 율곡 이이가 ‘호불(好佛)한 자를 후학의 모범으로 삼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현전하는 이조년의 초상화 이모본에는 손에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지만 염주는 지워졌다.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은 “이모는 원본을 그대로 베낀다는 의미이지만 성주 이씨 집안의 초상화에는 당시 시대상에 맞게 고쳐나가는 과정이 드러난다”며 “이모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고 설명했다.
조선 후기 초상화는 인물의 얼굴과 옷자락에 입체감과 음영을 살렸다. 그러나 성주 이씨 집안의 초상화 이모본에는 이런 기법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얼굴이 고려 말 조선 초의 원본과 달라질 수 있어 당시 유행한 화법(畵法)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이들 초상화는 성주 이씨 집안의 목판 족보와 함께 7일 오후 2시 경기 성남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열리는 제19회 장서각 콜로키움에서 처음 공개된다. 논문 ‘성주 이씨 가문의 초상화 연구’를 발표하는 윤 연구원은 “이모본 제작은 조상의 얼을 후대에 남긴다는 의미”라며 “문중에 소식을 알리고 돈을 모으는 이모본 제작 과정은 집안의 큰 행사이자 가문의 구성원들이 결집하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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