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가을 연이어 무대를 휩쓰는 이 두 작품은 닮은꼴이다. '지킬 앤 하이드'는 '보물섬'으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1886년 작품이다. 당시 뿐 아니라 지금 봐도 센세이셔널한 주제를 생생하게 다룬다.
'오페라의 유령'은 프랑스 작가 가스통 르루의 1910년도 작품. 파리의 오페라 극장을 주 무대로 지하에 숨어 한 여인을 비극적으로 사랑해야했던 천재음악가의 삶을 다루었다. 19세기 런던과 파리를 배경으로 한 이 두 작품에서 거론하고자 하는 공통적 주제는 '편견의 사회학'이다.
● 국내 뮤지컬 계의 신화가 된 작품
천재적 과학자로 인간의 선과 악을 분리시켜 악을 말소하고자 시약을 발명한 지킬 박사. 그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을 병원 이사회에 요구하지만 당시 사회의 윤리적, 종교적 반대로 좌절한다. 결국 스스로를 실험대상으로 삼은 지킬 박사는 자신 안에 감춰졌던 악의 화신 하이드를 풀어놓게 되고, 그는 연쇄살인을 저지른다.
요즘 명칭으로는 완전히 '사이코패스'다. 그러나 하이드는 지킬 박사를 반대했던 기득권층 요인을 제거해 나간다는 점에서 그 스스로는 이유 있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어떠한가? 그 역시 오페라 극장에 투자지분도 없고, 의사결정권도 없는 주제에 극장오너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일삼다가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안하무인 지능적 폭력범인 셈이다.
그러나 '유령' 나름으로는 이유가 있다. 숨겨진 프리마돈나이자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크리스틴을 정상에 우뚝 세우려는 계획에 반기를 드는 기득권층을 응징하는 과정일 뿐이다. 지나치게 윤리적인 지킬과 사회적 규범을 비웃으며 본능적 욕망대로 행동하는 하이드.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신사적이고 선하기 그지없는 음악가이나 반대세력에게는 폭력을 불사하는 악의 화신 유령. 이 둘은 정신의학적으로는 '다중인격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악마의 모습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편견의 사회'였음에 주목해야 한다.
지킬 박사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그는 황우석 박사를 찜 쪄 먹을 바이오벤처산업의 대가가 되어 다국적 제약회사를 경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유령이 현세에 나타났다면 그는 프랑스를 벗어나 국제 예술계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대박행진을 기록하는 작곡가이자 마에스트로로 인정받았을 수 있겠다.
지킬은 선악의 구분은 신의 영역이라는 종교재판의 역사적 끝물에 희생되고 말았으며, 유령은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기형 때문에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회에서 괴물로 이지메 당한 끝에 은둔생활로 삶을 끝맺는다. 사회적 범죄자임에 분명하지만 이들을 괴물로 만든 것은 그 자신들의 선택에 앞서 사회적 편견에 내몰린 희생자임을 직시할 때 이 작품들에 숨겨진 가치가 빛을 발하게 된다.
● 캐릭터에서 읽은 '편견의 사회학'
하이드와 유령의 당대에 비해 우리가 살아 숨 쉬는 현대사회는 상대적으로 편견을 극복하고 '열린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 놓여있기는 하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고 충분히 열려있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 젊 은 아티스트들은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막 날개를 달려고 할 때 사회적 이지메에 돌팔매질 당하고 피 흘리며 스러져 가는가? 나아가 언더그라운드라는 지하에서 빛의 세계로 올라오기조차 힘들어 땅속에서 질식해 가는 청춘은 왜 이리 더 많은가?
무대 위의 하이드가 광기를 발산하는 모습에 관객들은 열광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유령의 비극에 감정이입하며 눈물 흘리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극장 문을 나서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우리는 다시 편견의 사회에 일원으로 종속되고 만다.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던진 돌팔매는 우리가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순간,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복잡계 사회 속에서 다양한 가면을 쓰고 다중인격으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은 지킬과 하이드, 유령의 모습 속에서 자화상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지킬 앤 하이드' 내한공연을 원톱으로 뛰고 있는 브래드 리틀이 '오페라의 유령'을 가장 오랫동안 연기했던 뮤지컬 배우라는 점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최영일/문화평론가 vincent20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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