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못하는 남자’라도 부엌엔 욕심나!

  • 입력 2009년 10월 4일 21시 23분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는 혼자 사는 남자인 조재희(지진희 분)가 혼자 스테이크를 구워 와인과 함께 아구아구 먹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조재희가 잘생겼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무슨 옷을 입고 있나를 보았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독신남인 조재희의 거실을 바라보는 넓찍한 대면형 부엌이 부러웠다.

만약 조재희가 좁은 부엌 구석에서 벽을 마주보고 고기를 굽고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카메라 앵글도 안 나왔겠지만, 영 럭셔리한 독신남 분위기도 안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나는지, 그런 넓찍한 대면형 부엌에서 아일랜드에 빌트인 된 전기레인지라니. 뭘 하든 럭셔리하지 않겠는가.

부엌가구에도 분명히 유행이 있다.

예전의 일자형 부엌에서 아일랜드 테이블을 하나 둔 형태로 부엌가구의 유행이 바뀐 것은 이미 몇 년 전 일이다. 처음에는 큰 평수의 부엌에서나 가능한 형태로 여겨졌지만 차츰 기존의 식탁을 아예 치워버리고 부엌의 아일랜드가 식탁도 되고 조리대로도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바뀌어 20~30평형대 부엌에도 많이 도입되었다.

우리집도 그런 방식을 도입하여 어찌되었든 아일랜드를 만들었다. 비록 등받이도 마땅치 않은 높은 바의자에 앉아 식사를 해야 하긴 하지만, 집에서 매일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니니 잠시의 안락함을 위해 아일랜드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거실을 보면서 일할 수 있는 대면형 부엌은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처음부터 대면형으로 설계된 요즘의 큰 평수 집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집을 고쳐보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대면형 부엌은 그저 어떻게든 아일랜드를 하나 두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실을 마주보고 탁트인 구조, 수도꼭지와 가스 및 후드의 위치 등 여러 가지가 얽혀있는 문제인 것이다. 안락함을 희생하고 아일랜드를 설치했건만 거실이 아닌 복도벽장 문짝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실을 보고 설거지를 하자니 수도꼭지와 배수구의 위치가 바뀌어야 한다. 수도관을 건드리는 대공사. 조재희처럼 거실을 보고 스테이크를 구워보고 싶어도 단지 아일랜드에 전기렌지 쿡탑을 심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음식 냄새를 뽑아줄 후드의 위치가 바뀌어야 한다. 실제로 인테리어를 하는 지인에게 후드의 위치를 부엌 한 가운데의 아일랜드 위쪽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한지 물어보았더니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뭐든지 가능하죠. 돈이 문제지"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모조품도 대용품도 없는 대면형 부엌을 가지고 싶게 되었을까? 부엌가구 선전을 보면 대면형 부엌의 장점으로 설거지를 하면서도 가족을 등지지 않고 가족과 함께 할 수 있고 등등의 문구가 적혀있다. 그래서 이름도 '대면형'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 대면할 사람이 없다해도 앞이 트인 대면형 부엌이 가지고 싶다. 혼자 사는 조재희가 텅 빈 거실을 음미하며 와인잔을 든 것 만큼은 아니더라도, 기왕이면 벽을 등지고 탁 트인 앞을 보고 일하고 싶다. '

생각해보면 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벽을 보는 자리와 벽을 등지는 자리 중에 고를 수 있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벽을 등지는 자리를 고르지 않을까. 뒤에서 누가 들여다보거나 말거나의 문제가 아니라도 말이다. 임원실이건 뭐건 개인 사무실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책상을 방 가운데 둔다.

방 모서리에 벽을 보고 책상을 붙여놓은 임원실을 생각해보자.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지. 비록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 뻔하더라도,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믿으면서 그저 벽을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도록 앞을 보면서 일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대면형 부엌도 마찬가지다. 대면형 부엌이 공간이라는 희소한 자원을 배분하는데 있어 부엌 앞으로 떨어지는 몫이 워낙에 적다보니 지금까지 드물었던 것 뿐, 알고 보면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비록 설거지를 하면서 지켜보아야 할 어린 자녀나 요리를 준비하면서 대화를 나눌 다른 식구가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말이다. 아무리 좁은 집이라도 대면형 부엌은 60㎝ 폭의 부엌 카운터 앞보다는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해 줄 수 있다. 더 나은 사무환경을 꿈꾸듯, 더 나은 부엌환경을 꿈꾼다.

당분간은 그저 희망사항이다. 당분간 문 앞에 내 이름이 박힌 별도의 사무실이 그저 희망사항이듯이. 사이좋은 두 희망사항.

필자 : 박지하

약력: 글쓰기가 좋아 잠시 기자 생활을 했지만, 세상을 분석하는 일에 더 매력을 느껴 경영 컨설턴트로 변신했다. 남들이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서울생. 서울대졸. 1975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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