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담의 귀재들 이제는 입담도 프로급 “남김의 미덕이란 말도 있고, 하나 정도는 남겨두려고요.” 얼마 전 제5기 한국물가정보배 시상식에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든 ‘돌부처’ 이창호 9단의 인터뷰 답변이다. 이 대회에서 우승했으면 지금까지 참가한 모든 기전을 한 번 이상 석권하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는데 김지석 6단의 돌풍에 밀려 아깝게 놓치고 말았다. ‘우승 제조기’였던 이 9단에게 어느새 ‘준우승 단골’이라는 이력이 붙었지만 그의 답변에선 까치밥을 연상케 하는 여유로움과 내년 대기록 달성을 기약하는 암시가 묻어났다. 서울 이화여대에서 열린 한국바둑리그 투어 무대에선 은발의 조훈현 9단이 특유의 능청으로 팬들을 휘어잡았다. “저처럼 순한 바둑도 없을 거예요. 먼저 맞는 게 아파서 때리는 것뿐입니다.” 막강 전투력으로 숱한 기사들을 좌절시켰던 ‘전신(戰神)’의 엄살이었다. 프로기사들의 말솜씨가 부쩍 좋아졌다. 대국이 끝난 뒤 진땀이 식기도 전에 마이크를 들이대는 TV 인터뷰가 늘면서 팬들을 향한 말을 고민하는 듯하다. 감칠맛 나는 말은 그 자체로 팬 서비스이자 긴장 완화나 자기 암시의 방편이 된다. TV 인터뷰 때 기사들에게 가능하면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최선’과 ‘운’이다.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순간 인터뷰의 재미는 뚝 떨어진다. “최선을 다해 두겠습니다” “상대의 실수로 운이 좋아 이겼습니다”처럼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천편일률의 정답인 까닭에 팬들은 실망한다. 모처럼의 기회가 왔을 때 김빠진 대답을 내놓았던 경험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준비와 노력만이 후회와 아쉬움을 줄일 수 있다. 바둑이 그렇듯 말솜씨도 타고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말수가 적어 ‘무언(無言) 화법’에 가까웠던 이창호 9단도 이젠 그의 한마디를 팬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경지’에 오르지 않았는가. 실력도 관건이지만 팬 서비스를 준비하고 노력하는 기사들에게 팬들은 더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가령 이런 인터뷰를 들을 때면 귀가 시원해진다. 전남 신안군 바닷가에서 펼쳐진 한국바둑리그 투어에서 첫판을 패한 강동윤 9단에게 소감을 물었다. “첫판을 진 것은 앞으로 상대 선수들이 느낄 기분을 미리 한 번 느껴보고 싶어서였던 거고, 앞으로는 그럴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달 30일 스카이바둑배 시니어연승전 시상식에선 ‘손오공’ 서능욱 9단의 화술도 이어졌다. 6연승을 거둔 뒤 마지막 상대로 조훈현 9단을 만나게 된 상황. “예전엔 무수히 졌지만 이젠 조 국수도 같이 나이를 먹는 처지여서 해볼 만하다고 봅니다.” 그들의 ‘말말말’을 한껏 기대해도 될 것 같다.
이세신 PD ※반상의 승부를 둘러싼 뒷이야기와 바둑계 화제를 ‘이세신 PD의 반상일기’에서 전합니다. 이세신 PD는 서울대 영문과를 나와 1996년 바둑TV에 입사했으며 현재 편성기획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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