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4>물산장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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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12일 02시 57분


1922년 평양 조선물산장려회의 근검절약 및 토산품 애용 포스터.
1922년 평양 조선물산장려회의 근검절약 및 토산품 애용 포스터.
“조선사람 조선 것을”
일제 탄압 이겨내며
기생까지 국산 애용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난 이후로 사치하는 풍속은 매우 줄었겄다. 그 전에는 외국비단으로 옷을 해 입는 것으로 자랑거리를 삼았으나 이제는 길거리로 다녀도 그런 사람이 없게 되였다.…가정의 부인네들도 돈이 덜 드는 명주나 옥양목이나 광목으로 검소하고도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비단옷을 입는 것은 모양을 팔고 웃음을 파는 화류계 여자들이 할 일이라 생각하게 된 것은 참 기쁜 일이다.” ― 동아일보 1923년 9월 23일자》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시작은 1920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인 대회를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평양의 유지들이 근검절약과 토산품 애용을 장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20세기 초 인도에서 펼쳐진 스와데시 운동의 한국판이었다. 스와데시 운동은 인도를 식민지로 경영하던 영국이 벵골 지역을 분할 통치하려는 것에 반발해 인도인들이 영국 제품 불매운동과 인도 제품 장려운동을 펼친 것을 말한다.
일제는 초기부터 이 운동의 숨겨진 항일의식을 간파했다. 평양의 조선물산장려회가 2년 가까이 창립되지 못하다가 1922년 6월에야 창립된 것도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은 이 운동을 통해 희망을 찾아냈다. 거기엔 자본 축적의 출발점으로서 막스 베버가 말한 기독교적 근검절약의 윤리와 일제 자본에 맞설 독자적 민족 자본 형성의 열망이 함께 숨쉬고 있었다.
이에 호응해 조선청년연합회와 동아일보가 주축이 돼 이 운동의 전국화에 발 벗고 나선다. 1923년 1월 23일 서울에서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지도할 조선물산장려회가 출범하고 그해 설날(2월 16일)을 기해 전국에서 일대 가두 행진을 기획했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실행 요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 둘째, 설탕 소금 과일 음료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물은 모두 우리 것을 사 쓴다.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상용하되 부득이하게 외국 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가급적 절약을 한다.
동아일보는 조선물산장려회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며 물산장려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했다. 특히 2월 16일자 1면에 일본 경찰이 강연회만 허용하고 가두집회를 불허한 것을 정면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3면엔 ‘금일부터 실행’이란 특호활자를 걸고 지면의 절반 이상을 물산장려운동 기사로 채웠다. ‘조선 사람 조선 것’과 ‘내 살림 내 것으로’ 등 이 운동의 공식 표어 공모도 동아일보를 통해 이뤄졌다.
이에 힘입어 이 운동은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 그해 5월 말까지 결성된 물산장려회의 수가 157개에 이르렀다. 군산과 동래에선 기생도 이 대열에 참여했다. 이 운동은 일제가 조선물산장려회를 강제 해체하는 1940년까지 계속됐고 동아일보 보도도 꾸준히 이어졌다. 국채보상운동을 계승해 국민 단결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그 정신은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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