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5>순회 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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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13일 02시 49분


도쿄 유학생들
시국토론 불지펴
최고 3000명 모여

《“동경에 유학하는 조선청년으로 조직된 학우회는 하기방학을 이용하야 조선 각지에 순회강연을 행하기로 결정한 바…오직 용(勇)하고 지(知)하고 또한 순결한 자라야 하리니, 실로 지식청년계급의 피치 못할 중임(重任)이라 하노라….”
―동아일보 1920년 6월 29일자》
도쿄(東京)유학생 학우회는 1920년 7월 9일부터 부산 동래를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강연회를 개최했다. 18명의 유학생이 그동안 연마한 신지식을 동포들에게 풀어놓기 위해 방학을 반납하고 나선 것이었다.
1920년대 초반은 계몽운동의 한 방식으로 강연·강습회, 웅변대회 등이 자주 열리던 시기였다. 일제의 문화통치로 강연회 등의 모임이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경관을 배치해 강연회를 감시하고 통제했다. 지식과 힘을 길러야 한다는 강연 주제가 민족자강과 연결되면서 사실상 ‘시국토론회’의 성격이 짙었기 때문이다.
도쿄유학생의 순회강연에 대한 관심은 비상했다. 부산을 시작으로 울산 김해 대구 통영 공주 청주 천안 등을 거쳐 18일 서울 단성사에 도착했을 때는 ‘3000여 명이 운집한 사상 초유의 대집회’가 됐다.
이날 게이오(慶應)대 학생 김도연이 ‘조선 산업의 장래에 대하여’를 강연하자 경관은 “불온한 언사로 치안을 문란케 했다”며 강연을 중단시켰다. 이후 강연단을 강제 해산시켜 서울 이북의 순회 일정은 무산됐다. 당시 동아일보는 순회강연을 적극 후원하며 도쿄 출발부터 취재해 보도했다. 강연단 해산명령을 비판한 7월 22일자 신문은 발매금지를 당했다.
4년 뒤인 1924년 10월 24, 25일 동아일보는 서울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전 조선 현상(懸賞) 학생웅변대회’를 직접 주최하며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토론회를 이어갔다. 3000여 명이 운집한 이 대회에 일제는 경관 외에 형사 2명을 따로 두어 밀청(密聽)할 정도로 관심을 기울였다.
의학을 공부하던 최수원은 ‘우리들의 병은 무엇인가’라는 주제강연에서 “우리 조선의 양분을 빨아먹는 이 기생충은 의복에 붙어 있는 빈대와 달라서 잡아서 버리려고 하면 무력을 행사해 도리어 우리들을 압박하고 더욱 유린한다”고 웅변했다. 경관이 연설을 중단시키자 청중이 흥분했으나 “동아일보를 사랑하거든 참아달라”는 사회자의 간청에 따라 대회가 중단되는 위기는 넘겼다.
교육 여성 위생 과학 등 다양한 주제로 열리던 강연회는 신문을 통해 대중에게 시시각각 소개됐다. 1920년 4월부터 1925년 말까지 약 5년간 동아일보에 소개된 강연회 기사는 2097건. 대회장에 진입하려고 창문을 넘어갈 정도로 당시의 강연회는 대중에게 ‘토론의 오아시스’였다.
토론의 금기가 사라진 지금의 눈으로 보면 1920년대 강연회나 시국토론회는 분명 낯선 풍경이다. 하지만 지금의 자유도 일제강점기 이후 지난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터넷에서의 일부 일탈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오늘날, 80여 년 전 ‘시국토론회’의 정신은 역사적 귀감이 아닐 수 없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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