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을 촬영하는 것과 건축물을 그리는 것은 비슷한 듯하지만 전혀 다르다. 셔터 한 방으로 프레임에 쓸어 담을 때 전신주나 구멍가게 간판, 골목으로 난 작은 창문 같은 것은 무심히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손으로 그릴 때는 모든 피사체가 저마다 존재 이유를 드러낸다.
‘서울풍경화첩’(사문난적)은 건축가 임형남(48) 노은주 씨(40) 부부가 10여 년 동안 한장 한장 함께 그려 모은 서울 풍경의 기록이다. 2003년의 종로구 효자동 적산가옥(敵産家屋)과 북악산, 2005년의 중구 명동 야경, 2006년 시청 모습 등을 연필 스케치와 옅게 입힌 수채 물감으로 그렸다.
여는 글 앞에 삽입한 첫 그림은 2003년 남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서울 풍경이다. 빼곡하게 붙어 선 건물 사이로 군데군데 숨어 있는 고가도로까지 세심하게 그렸다. 부드러운 연필 선으로 풍광을 차분히 그린 다음 따뜻한 푸른색으로 여백을 채웠다. 서울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담긴 온기가 느껴진다.
중구 을지로3가에서 태어나 자란 임 씨는 “아직도 서울은 내게 읽히지 않는 지도”라며 “과거의 길과 현재의 길이 뒤엉킨 도시의 속도가 삶의 속도를 앞질러 가끔 길을 잃게 된다”고 썼다.
“서울은 많이 변했지만 ‘아쉽다’고 말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피맛골의 생선 굽는 냄새보다 그 길에 담긴 옛사람들의 사연이 애달프고, 달동네의 골목길이 마냥 아름답다’ 하려다가도 그 풍경 속의 절박한 생활을 알기에 망설이게 된다.”
서울의 숨 가쁜 속도감과 어지러움에 익숙한 이들 부부에게 복잡함과 시끄러움은 버릴 수 없는 물과 공기 같은 것이다. 수십 년을 살아온 도시 구석구석에도 처음 보는 낯선 공간이 많다는 사실에 재미있어 하고, 그렇게 수집한 흥미로움을 그림에 담았다.
2008년 그린 종로구 예지동과 세운상가 풍경에는 “500년 된 길과 100년 된 건물과 40년 조금 넘은 건물이 각각의 사라질 시간을 받아놓고 서로를 바라본다”는 설명을 붙였다. 임 씨는 “서울이라는 공간이 구석구석 품고 있는 풍경이 더 지워지기 전에 제대로 알고 싶고, 오래 기억하고 싶다”고 했다.
“은퇴 뒤에 푸른 자연이 있는 널찍한 곳으로 가서 집을 짓고 살겠다는 친구도 있지만, 나는 서울의 한복판 종로나 을지로에 바늘 하나 세울 공간이라도 찾아내 집을 짓고 싶다. …나의 애정은 정당한 것일까? 그래서 나는 서울을 샅샅이 그려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홍익대 건축과 선후배 사이. 설계사무소를 함께 운영하며 나란히 모교에 출강하고 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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