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6>티룸과 가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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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14일 02시 57분


新문물 커피 들며
시대 불안 쏟아낸
모던보이 사랑방

《“오늘날 ‘꼬십’의 교환처밖에 되지 안는 이 다방이란 존재도 장차 뭇슨 신예술의 요람이 될 것인가.… 시대의 불안과 생활의 과로가 너나를 불문하고 다방의 한구석으로 끌어감이 사실이지만 돌이켜보면 다방이란 결코 고마운 존재가 아님에는 틀림이 없다.”
―동아일보 1935년 6월 6일자》
대한제국 때 개화 바람을 타고 커피가 들어왔다. 처음엔 ‘가배차’나 ‘가비차’라고 불렀다. 커피가 보급되자 다방이 뒤늦게 따라왔다. 다방이 경성에 자리 잡기 시작한 건 1920년대 초. 지금의 명동과 충무로, 소공동 일대에 몰려 있었고 종로에도 몇 군데가 생겼다. 다방은 예술가와 대학생의 사랑방이자 휴게실이었고 빈한한 문인의 집필실이 됐다. 끽다점, 찻집, 티룸으로도 불린 다방은 외래 문물의 표상이었다.
1936년 1월 4일 동아일보에는 다방 여급이 방송 아나운서와 나란히 ‘색다른 직업여성’으로 소개됐다. 기사에 등장하는 여급의 말.
“찻집에서 보는 세상요? 호호호― 별달을게 있나요? 남자란 너무 횡폭하드군요. 돈만 갖이면 여자를 능히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거첨―찻집엘 오면 점잔케 차나 먹고 가는 게 아니라 별별수작을 다하고… 아이참 내그러케 칩칩한 사나이들은 처음 밧어요.”
암울한 시대의 지식인들은 유럽식 살롱문화를 다방에서 실현하려 했다.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이 종로구 관훈동에 ‘카카듀’를, 1929년 영화배우 김인규가 종로2가 YMCA 근처에 ‘멕시코’를 열었다. 극작가 유치진이 소공동에 다방 ‘쌀론 플라란’을 냈다는 기사도 1933년 9월 1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같은 해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도 기생 금홍과 함께 청진동에 ‘제비’를, 이어 인사동에 카페 ‘쯔루’를, 명동에 다방 ‘무기’를 열었다가 결국 모두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평론가 홍효민은 1935년 6월 30일 동아일보에 수필 ‘다방’을 기고했다. “이 다방은 머지안흔 장래에 거의 전조선적으로 없는 곳이 없지 안흘 것이다.… ‘아메리카’의 ‘모더니즘’이 진전해오듯이 되고 잇는 까닭이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비상시국이 이어지자 종로경찰서는 여급의 애칭과 다방, 카페, 바의 외국어 명칭을 일본식으로 고치라고 지시했다(동아일보 1939년 10월 29일). 커피 한 잔에 40전을 받은 다방 주인이 폭리를 취했다며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1940년 6월 8일).
광복 후 1950, 60년대에도 다방은 도시의 문화공간이자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6·25전쟁 이후 주한미군을 통해 인스턴트커피가 퍼지면서 다방도 급속히 늘었지만 이제 그 자리에는 커피전문점이 들어섰다. 다방은 소도시의 후미진 구석에나 어울리는 공간이 됐다. 올해 8월 스타벅스는 300호점을 열었다. 한국 진출 첫해인 1999년 86억 원의 매출이 10년 만에 1710억 원으로 20배 가까이 늘었다. ‘디지털 유목민’으로 불리는 정보기술(IT) 세대가 노트북컴퓨터 하나로 접속의 자유를 누리면서 커피전문점은 현대인의 일상에 더욱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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