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리를 낼까' '어디서 실수할까'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다면서요? (웃음) 뮤지컬 배우와 지망생들이 '단역이라도 맡으려고 밤새 연습하는 데 넌 뭐냐'고 쓴 글도 인터넷에서 봤어요. 그렇지만 저, 다른 뮤지컬은 관심 없어요. '헤어스프레이'라서 꿈을 꿨고 도전한 거에요."
그가 맡은 역할은 뚱뚱하고 못 생긴 10대 소녀 '트레이시'. 공부보다 춤추는 걸 좋아하다 우여곡절 끝에 TV 댄스경연대회에서 우승하고 멋진 남자친구까지 갖게 된다는 이야기다. 1960년대 미국 볼티모어가 극의 배경이다.
● 오디션서 심장소리 들리도록 '덜덜'
박 씨는 2007년 '헤어스프레이' 초연 때 오디션에서 떨어진 뒤 협력프로듀서라는 이름으로 제작발표회 사회를 봤다. 배우들이 시연할 때 쭈그려 앉아 울었다. '저 자리에 서고 싶은데….'
대형 콘서트에서 사회를 보면서도, 심지어 대학 입시 때도 담담했다는 그가 올해 오디션에서는 심장소리가 들릴 정도로 덜덜 떨었다. 노래를 마친 뒤 심사위원이 "꽤 잘 하네"라고 말하자 눈물이 저절로 주르르 흘렀다.
박 씨의 보컬 트레이닝을 맡은 이정아 씨는 "거친 소리, 쇳소리, 탁한 소리…. 경림 씨 목소리는 나쁘다는 조건은 다 갖췄어요."라고 말했다. "피곤하고 듣기 싫은 목소리죠. '헤어스프레이' 오디션을 앞두고 찾아왔을 때 제가 그랬어요. 그냥 취미로 하시죠, 라고."
첫 레슨 때 박 씨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이 씨는 '그럼, 그렇지'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끝날 무렵 귀가 번쩍 했다. 한순간 아주 맑고 청명한 고음이 들렸다는 것.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씨의 성실함과 열정도 마음을 움직였다. 이 씨는 "박 씨의 고음에 숨어있던 '청정지대'를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라고 귀띔했지만 이날 박씨가 그 목소리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이나 '미녀와 야수'의 벨 같이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는 당연히 죽었다 깨나도 못 내요. 하지만 트레이시라면 열심히 노력해서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어요. 불가능한 일인데 제 욕심 채우려고 최고의 뮤지컬을 망치는 일은 안 해요."
'헤어스프레이'와의 인연은 6년 전 시작됐다. 한창 솟구치는 인기를 뒤로 하고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 2003년. 친하게 지내던 정범진 뉴욕경찰청 부장검사가 "여주인공이 꼭 너 같다"면서 '헤어스프레이' 티켓 2장을 선물했다.
영어 대사와 노래를 절반 밖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바닥에서 성공을 이룬 트레이시는 '또 다른 박경림'으로 여겨졌다. 다음날 표를 또 사서 봤다. 이후 시간 나는 대로 극장을 찾아갔다. 그렇게 본 게 15번을 넘는다. '헤어스프레이' OST 앨범은 눈 뜨자마자 함께 하는 유학생활의 벗이었다.
"언어도 배경도 달랐지만 남 이야기 같지가 않았어요. 저 역시 어렵게 자랐지만 꿈 많은 고등학생이었고,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방송에 출연하는 꿈을 이뤘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예뻐서 뜬 건 아니었잖아요?(웃음)"
트레이시로 무대에 서고 싶었지만 아무도 주인공을 시켜줄 것 같지 않아 직접 제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모아둔 돈 1300만 원을 들고 브로드웨이 '헤어스프레이' 사무실을 찾아갔다. 이미 신시뮤지컬컴퍼니가 라이선스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무작정 전화했다. "뭐라도 할 테니까 시켜만 주세요."
그는 2007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우수상 수상소감에서도, 올해 3월 출산휴가를 마치고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MC로 복귀할 때도 "다음 목표는 뮤지컬"이라고 말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덜 부담스럽다고 했다.
"남들이 뭐라 해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넘버 '굿모닝 볼티모어'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언젠가 뜨게 되면 온 세상이 반겨 주리라.' 많은 사람들이 뮤지컬 무대에 선 저를 보고 새로운 꿈을 꾸리라 확신해요. 진정 원하면 안 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11월 28일~2010년 2월 7일 한전아트센터, 4만~8만원. 1544-1555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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