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비참하기에 구원받은 영혼들… 술꾼과 악마의 내기 그린 연극 ‘뱃사람’

  • 입력 2009년 10월 15일 02시 58분


다섯사내 천연덕스런 술꾼 연기
극적 반전통해 가슴 뭉클한 감동

때는 성탄 전야. 다섯 명의 늙수레한 사내가 아일랜드 더블린의 어두컴컴한 반지하 거실에서 포커 판을 벌인다. 그들은 대낮부터 마신 술로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상태. 여자는 한 명도 등장하지 않고 홀아비 냄새만 물씬한 늙은 수컷들만의 술판과 도박판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연극 ‘뱃사람’(연출 이성열)은 보통의 통속극조차 외면했을 칙칙한 상황 속에서 예상치 못한 반전과 가슴 뭉클한 감동을 끌어올린다. 도대체 어떻게.

첫째는 배우의 힘이다. 이 연극엔 다섯 사내가 등장한다. 매일 술에 취해 지내다 시력을 잃은 리처드(이호재)와 그보다 더한 술꾼이지만 형을 돌보기 위해 외지에서 돌아온 뒤 사흘째 단주 중인 샤키(이남희) 형제, 리처드의 술친구인 우유부단한 아이반(이대연)과 약삭빠른 니키(이명호), 그리고 이날 처음 리처드의 집을 방문한 록하르트(정동환)란 의문의 손님이다.

이들을 연기하는 다섯 남자배우는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진짜 배우’들이다. 거친 파도와 싸워 살아남은 뱃사람을 연상시키는 이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방탕한 술꾼의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그려낸다. 몸도 못 가누면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리처드, 술에 취해 외박하고선 다시 아내가 무섭다면서 술에 취하는 아이반, 텅 빈 술집에서 만난 록하르트와 온 동네 술집을 순례하고 나타난 니키. 그들의 입을 통해 폭로되는 샤키의 전적은 더 기막히다. 극의 전반부를 끌고 가는 힘은 이런 술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연기의 앙상블에서 나온다.

둘째는 이야기의 힘이다. 알코올중독자로 죽음 문턱까지 갔다 온 아일랜드의 극작가 코너 맥퍼슨은 악마와 내기를 펼치는 유럽전통의 설화를 끌고 와 이 구제불능의 인간들 속에 구원의 촛불을 밝힌다. 점잖은 신사로만 보였던 록하르트의 실제 정체는 악마다. 샤키와 단둘이 남게 되자 그는 25년 전 살인죄를 저지른 샤키가 무죄 방면되게 도와주면서 했던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한다. 포커를 쳐서 샤키가 지면 그의 영혼을 가져가겠다는 약속이었다. 약속을 까맣게 잊고 살던 샤키는 공포에 떨면서 포커 판에 들어간다. 취기로 반쯤 얼이 빠진 세 술꾼들과 뒤섞여….

득의만만한 록하르트는 그들을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신은 왜 똥파리 같은 이들 인간을 사랑하는지 모르겠다”는 독설을 펼친다. 그러면서 다른 4명의 추한 진실을 하나 둘 까발려나간다. 이제 샤키가 멤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빼앗기는 파우스트가 될 것인가 싶은 순간, 실로 어이없는 반전이 펼쳐진다. 그 반전엔 ‘인간이 한없이 비참한 존재이기에 오히려 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역설적 휴머니즘이 녹아 있다. 극이 끝날 무렵 흘러나오는 존 마틴의 노래 제목, ‘스위트 리틀 미스터리’의 감상을 위해 결말은 아껴두자. 다만 리처드의 술주정 중 한 부분만 인용한다. “그분의 존재와 그 놀라운 의도가 저 한 마리 청파리처럼 작고 세밀한 놈 안에도 들어 있구나,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뭐겠어요.” 18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02-765-5476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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