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7>전차와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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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15일 02시 58분


경성의 출퇴근길에
30년 격차두고 등장
전차원-뻐스걸 관심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업시 함부로 타는 바람에 별별 희극이 ‘뻐스’ 안에서 닐어나서 ‘뻐스걸’을 울린다 한다. 그들이 로동하는 일곱시간에 편히 몸 한번 쉬지 못하고 흔들리는 ‘뻐스’ 안에서 승객의 무릅과 꽁문이에 전신을 충돌하야가며 조선말과 일본말로 목이 쉬도록 웨치는 그들의 직업은 견대지 못할 여러 가지 고통이 잇다한다.”
―동아일보 1928년 4월 25일자》
일제 강점하 경성(서울)은 전에 없던 속도로 사람들을 흡입했다. 새로 생긴 공장과 관청, 은행을 위시한 서비스업이 일자리를 제공했고 수탈로 삶의 기반을 잃은 농민은 기회를 찾아 무작정 도시로 향했다. 1920년 25만여 명이던 경성부(府)의 인구는 10년 뒤 35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당시 경성 시민들이 출퇴근에 이용한 교통수단은 전차였다. 대한제국기인 1898년 청량리와 서대문을 잇는 전차가 개통된 것을 시작으로 1921년에는 망우리, 양평동 등을 잇는 5개 노선이 골격을 갖췄다. 그러나 승객의 급증과 함께 여러 문제가 잇따랐다. 1920년 4월 19일에는 ‘전차원의 행악’이라는 제목으로 승객을 함부로 걷어차는 전차 승무원의 행태를 고발하는 기사가 실렸다. 1921년 3월 10일에는 ‘회중(懷中)을 계엄(戒嚴)할 시기’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주머니 속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1년간 전차 소매치기 피해가 10배나 증가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급증하는 교통수요의 해결책으로 버스가 등장했다. 1928년 2월 6일 동아일보에는 ‘부영(府營)뻐스 실현키로 결정, 경성역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안국동, 용산, 서대문, 장충동을 연결하는 4개 노선을 4월 개통한다는 기사였다.
버스에서 부민(府民)들을 대면할 차장(안내양)도 관심의 초점이었다. 운행 개시 이틀 뒤인 4월 5일 동아일보에는 ‘심규(深閨·가정)와 학창에서 돈벌러 가로(街路)로’라는 제목으로 차장들의 학력 분석 기사가 실렸다. 대부분 소학교만 졸업한 15∼20세 여성이었다. 가족을 부양하겠다는 기특한 ‘규수’들이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별별 잡것들이 잇서서 일전이 모자라니 륙전만 하라고 하고 두 구역을 타고 한 구역만 내겟다 하며… 이런 짓을 당할 때마다 눈물이 부지불식간에 쏘다져 나온다한다.” 운행 한 달이 채 못 된 4월 25일 기사다.
그러나 시내버스의 운송능력은 획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이후 평양 대구 부산 등지에서 속속 선을 보였다. 경성 부영버스는 광복 이후 서울시내버스의 모체가 됐다. 서울에서는 1984년 안내양 제도가 사라졌고 2004년에는 광역버스, 간선버스, 지선 및 마을버스로 나눈 새 버스노선 체계가 도입됐다. 전차는 1969년 서울에서 운행을 멈췄지만 1974년 ‘지하철’이라는 새로운 운송수단이 등장했다. 오늘날 서울 지하철의 총연장은 304km로 도쿄 뉴욕 런던에 이어 세계 4위이며 연간 수송인원은 3위에 이른다. 인천을 포함한 수도권 외에도 부산 대구 대전 광주에 지하철이 깔려 거미줄 같은 버스노선망과 함께 시민의 발이 되고 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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