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8>식당과 외식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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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16일 02시 55분


“총독부가 쫓아내서”
조선음식점 줄폐업
맛집 소개기사 등장


《“조선사람 음식은 번화한 곳에서 유축(외딴 구석)으로 드리쫏기고 그 대신 일본사람의 음식?이나 그러치 안흐면 조선사람이 경영하는 음식?이라도 예전부터 우리 입에 맛는 음식이 아닌 우동이니 스끼야끼니 맥주와 정종 가튼 것을 파는 집이 번화한 곳을 차지하게 됨니다.”

―동아일보 1925년 7월 2일자》

‘음식 장사가 남는 장사’라는 통념은 84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돈푼이나 가지고 장사를 좀 해보자 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먹이 장사를 하고자 하는 터’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조선인의 음식점 개업을 좀처럼 허가하지 않고 오히려 있던 음식점마저 없앴다.

1925년 7월 2일 동아일보에는 서울 종로경찰서 관내 조선인 음식점이 1년 만에 14곳에서 8곳으로 줄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엇떤 음식? 주인의 말’을 빌려 “경복궁에 총독부를 지은 이후로는 잇든 음식?도 옴겨가든지 페업을 하라기까지 한다”며 일제의 경제적 핍박을 꼬집었다.

민족 갈등으로 인한 방화나 폭행 사건의 단골 무대도 음식점이었다. 일본인 순사가 옆자리 조선인에게 신발을 벗어 던지거나 칼을 휘두르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음식점 신축을 반대한 지역주민이 관청에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요리점을 이전하면 그곳 지가(地價)가 저락(低落)한다.’ 1938년 8월 23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정갈하게 꾸민 조선 음식점은 민족의 문화적 자존심을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조선 맛 보이는 우리 요리점’이라는 제목의 1930년 1월 10일 기사는 “미려하게 건축한 현대식 콩크리트 양옥의 청결한 온돌 시설에서 순우리 요리로 내외 인사의 발을 끌어 조선인 체면을 세운다”며 익산 해신관(海信관)을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서양 요리는 1902년 서울 정동 손탁호텔 레스토랑에서 처음 일반에 소개됐지만 대중화가 더뎠다. 1925년에는 경성역(서울역) 2층에 서양식당 ‘그릴’이 생겼다. 이용자는 주로 같은 층에 있는 귀빈실(라운지)을 이용하는 승객이었다. 1936년 4월 25일 양식(養殖) 달팽이 사진과 함께 동아일보에 실린 ‘달팽이요리 잡숴보섯습니까’ 기사는 서양요리에 대한 생경한 시선을 드러낸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쪽 끼치는 달팽이가 불란서에서는 일등 요리로 사용이 된다니 징그럽지오? 생각만 해도 음식 맛이 없어질 것 같습니다. 맛은 점복맛과 꼭 같은데 영양분도 만합니다(많습니다).”

본격적인 서구식 대중 외식 문화는 1979년 10월 서울 중구 소공동에 롯데리아 1호점이 개점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육류 섭취가 늘면서 수많은 갈빗집이 문을 열었다. 1970년 웨스틴조선호텔이 첫선을 보인 뷔페는 갈빗집과 함께 1980년대 고급 외식의 상징이었다.

1992년 서울 서초구 양재동 TGIF 1호점에 이어 속속 들어선 패밀리 레스토랑은 10대와 20대를 주 소비층으로 겨냥했다. 이들이 기성세대로 성장한 지금, 종로 강남 등 번화가의 노른자위 땅에는 대형 패밀리 레스토랑들이 손님을 길게 줄 세운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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