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12>미쓰코시와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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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21일 03시 00분


日백화점 명동 상륙에 이듬해 민족자본 동원
종로에 ‘맞수’ 세우다

《“손님이 오시면 양복 한 벌을 삼십 분이나 한 시간씩 만지고 보는 동안 아모리 어렵드라도 상대로 의논해드리고 어떠한 무리한 주문이라도 친절하게 응대하는 것이 나의 본업이니 한 시간씩 허비하고라도 사주실 때는 기뿌지마는 그냥 도라 가실 때는 기맥힌 생각도 없지 없나 하지마는 손님으로서도 싸고 조흔 물건을 택하랴고 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오….” ―동아일보 1936년 1월 6일자》

1936년 화신연쇄점 경품 광고. ‘일 원어치 사시면 황소 한 마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36년 화신연쇄점 경품 광고. ‘일 원어치 사시면 황소 한 마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30년 10월 24일 경성의 ‘작은 도쿄’라 불렸던 혼마치(本町·오늘날의 충무로) 입구 옛 경성부청 터에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조선에 들어선 첫 백화점이었다. 3층짜리 르네상스식 건물의 위용은 화려했지만 1층에는 돗자리 형태의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고객들은 신발을 벗고 드나들어야 했다. 조선 사람들은 ‘다다미 백화점’이라며 이를 외면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에는 백화점 개장을 예고하는 기사가 실렸다. 양복부 외에 도서부, 악기부, 귀금속부를 갖추었다고 전했다. 처음 ‘삼월 오복점’이라고 불린 이 백화점의 주요 고객은 혼마치의 일본인들이었지만 차차 북촌의 부호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불똥은 종로 사거리에 있던 화신상회로 튀었다. 신태화가 설립해 귀금속 전문점으로 출발한 화신상회는 그런대로 백화점 형태를 갖추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화신상회의 입지가 흔들리자 양지(洋紙) 도매상이었던 박흥식은 신태화를 찾아가 화신상회를 35만 원에 인수한다. 기와집을 헌 자리에 미쓰코시에 버금가는 3층 콘크리트 대형건물을 지었다.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화신백화점이 문을 연 것은 1931년이었다. 이듬해 화신백화점은 최남이 세운 동아백화점을 인수하고 1934년 공장에서 각종 생산품을 다량 구입해 소매상에 공급하는 연쇄점 사업에 투자했다.

순풍에 돛을 단 듯하던 화신백화점이 위기를 맞은 것은 1935년 음력 설날을 하루 앞둔 일요일이었다. 백화점 근처 노점상에서 시작된 불씨가 삽시간에 백화점 건물을 삼켰다. 1935년 1월 29일 동아일보에는 ‘화신백화점 대화재 속보’가 상세히 실렸다. “이번 대화재로 인하야 받은 손해는 상품에 약 35만 원, 집기 약 10만 원으로 합계 45만 원에 달한다는데… 발화 즉시 과실장사 박모 외 3명을 종로경찰서에 체포해 계속하야 엄중히 취조하고 잇다.”

2년 후인 1937년 11월 11일 지하 1층, 지상 6층의 화신백화점이 다시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까지 갖춘 새 건물은 미쓰코시를 비롯해 조지야, 히라다 등 혼마치의 어느 백화점보다도 큰 규모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8년 국내 백화점은 78개, 시장 규모는 19조5000억 원에 이른다. 1963년 옛 미쓰코시 백화점 자리에서 출발한 신세계백화점은 올해 3월 부산 해운대에 센텀시티점을 열었다. 골프장, 스파랜드, 아이스링크, 영화관까지 갖춘 이 백화점은 6월 기네스월드레코드(GWR)로부터 ‘세계 최대 백화점’으로 공인됐다. 옛 신세계백화점은 지금도 건재하지만 화신백화점은 1987년 헐렸고 국세청이 입주한 종로타워가 이 자리에 들어섰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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