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憲問(헌문)’에서 공자는 有德有言(유덕유언)과 無德有言(무덕유언)을 대비해 ‘言’의 두 양태에 대해 말하고, 곧이어 ‘勇’의 두 양태에 대해 위와 같이 말했다.
주자(주희)는, 어진 사람은 마음에 私累(사루) 즉 사사로운 끌림이 없기 때문에 義를 보면 반드시 실천한다고 해설했다. 정약용은 忠孝가 지극한 仁者는 禍難(화난)에 두려움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것을 仁者之勇(인자지용)이라 한다. 봉건 조정의 신하가 時政(시정)의 잘잘못을 따져 直諫(직간)해서 그릇된 일을 반드시 바로잡고야 말았던 것도 이런 용기에 속한다.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고 맨몸으로 큰 강을 건너는 용기를 血氣之勇(혈기지용)이라 한다. 혈기지용만 지닌 사람은 용기 때문에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지만 仁者라고는 할 수 없다.
仁者之勇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好善惡惡(호선오악)에서도 살필 수 있다. 1530년(중종 25년) 섣달그믐에 51세의 李자(이자)는 자서전인 ‘自敍(자서)’를 지어 ‘선을 좋아하기를 독실하게 하지 못하고 악을 미워하기를 용맹하게 하지 못했다’고 自責(자책)했다. ‘논어’ ‘里人(이인)’에서 공자는 “어진 사람만이 능히 남을 좋아할 수 있고 또 남을 미워할 수 있다(唯仁者能好人, 能惡人)”고 했다. 같은 ‘이인’에서 공자는 ‘君子喩於義(군자유어의)’라고도 했다.
군자는 어떤 일이든 道義를 기준으로 삼아 사태를 放過(방과)하지 않는 법이다. 이자는 그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은 악을 미워할 용기가 없어서 옳지 못한 사태를 방과하고 말았다고 후회한 것이다. 우리도 비리와 부정을 방과하면서 惡惡無勇(오악무용)하지 않은가, 악을 미워하는데 용기가 없지 않은가 자책해야 할 듯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