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말씀’… 연극 ‘원전유서’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0월 26일 03시 00분


‘침묵’에서 솟아나는 감동

이성적 ‘말씀’이 아니라 식물적 ‘희생’에서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 연극 ‘원전유서’의 한 장면. 가난과 폭력에 짓밟혀도 묵묵히 그 고통을 감내하는 어진네(김소희·왼쪽)와 그 아들 어동이(제은화)는 그런 희망의 씨앗이다. 사진 제공 연희단거리패
이성적 ‘말씀’이 아니라 식물적 ‘희생’에서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 연극 ‘원전유서’의 한 장면. 가난과 폭력에 짓밟혀도 묵묵히 그 고통을 감내하는 어진네(김소희·왼쪽)와 그 아들 어동이(제은화)는 그런 희망의 씨앗이다. 사진 제공 연희단거리패
말씀의 폭포수가 쏟아졌다. 손우물을 만들어 받으려면 어느새 다른 말씀으로 넘쳐버렸다. 말씀은 거센 파도가 돼 관객의 뇌리에 와 부딪혔다가 갈무리할 틈도 주지 않고 흰 포말로 부서지며 물러갔다. 그 거품마다 독한 사유의 입김이 서려 있어 공연장은 곧 그 물안개로 뽀얗게 뒤덮였다. 연극은 그런 관념의 바다에서 관객이 길을 잃지 않도록 웃음의 조명탄을 길게 쏘아 올렸다. 말씀과 웃음에 취해 4시간 반이 흘러갔을 때 연극은 돌연 ‘기역 니은 디귿…’을 읊기 시작했다. 그리고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마치 그동안 자신이 쏟아낸 말의 쓰레기를 모두 회수해 가려는 듯. 순간 울컥 감동이 밀려왔다.

2008 동아연극상 5관왕을 수상한 ‘원전유서’는 확실히 힘이 셌다. 젊은 작가 김지훈이 펼쳐내는 농밀한 언어유희는 신인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촘촘한 사유의 그물 안에서 퍼덕였다. ‘불 밝힐 힘이 없는 자들은 추억의 불빛으로 살아가요’, ‘사상은 폐지에서 나오고 경제는 고물에서 나온다니까’, ‘신문은 하나밖에 없는 나라의 공책’, ‘쓰레기는 물질세계의 무의식’ 같은 명대사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끝없이 뽑혀 나온다.

그러나 파리한 관념의 세계에 매몰된 것도 아니다. 쓰레기매립지에 사는 버려진 인생에서 피어나는 곰팡이를 꽃으로 그려낼 줄도 알지만 하층민의 삶에 문신처럼 새겨진 폭력을 직시할 줄도 안다. 그 순간에 빛을 발하는 것은 이윤택 연출과 그가 이끄는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의 동물적인 연기다. 어린 의붓자식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폭력을 가하는 우출이(이승헌)와 그런 남편의 폭력으로 생때같은 두 자녀를 잃어야 하는 어진네(김소희)는 언어의 옷을 걸치지 않는 삶의 고통을 몸으로 형상화한다.

그렇게 연극은 말씀과 몸의 충돌을 펼쳐낸다. 산처럼 쌓인 쓰레기더미를 합법적 토지로 인정받아 빈민을 구제하겠다는 남전(윤정섭)은 말씀을 대변한다. 반면 남편의 폭력을 피해 두 자녀를 데리고 변소에 숨어 밥을 먹으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어진네는 몸을 대변한다. 말씀은 현란하고 몸은 어눌하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구원은 태초의 지점(원전)에서 출발한다. 남전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로 대변되는 로고스가 거세된 공간에서 어진네의 아들 어동이(제은화)는 시들어 죽는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기역 니은 디귿…’이란 말씀의 씨앗만이 남았다. 쓰레기더미에 묻힌 어동이의 무덤 위에 푸른 소나무가 자라고 남겨진 어진네에게는 슬픔을 이겨낼 희망이 기적처럼 싹튼다. 태초에 있던 것은 희생이다. 5시간 가까이 말씀의 폭포수를 쏟아낸 작가는 태연하게 말한다. 구원은 이성적이고 남성적인 말씀의 힘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내는 여성적 삶, 식물적 삶에 있다고.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된 이번 공연은 딱 3일간 펼쳐진다. 오후 4시에 시작한 24일 첫 공연은 두 번의 휴식시간을 포함해 오후 8시 45분에 끝났다. 작년보다 15분이 더 늘었다. 26일 마지막 공연은 오후 6시에 시작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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