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 오르면 공연예술이 되지만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는 문자예술인 ‘희곡’은 근대문학의 중요한 장르 중 하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소설, 시, 수필 등 다른 문학장르에 비해 유독 활성화되지 못한 분야이기도 하다.
장르를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해온 소설가 장정일, 시인 김경주 씨가 공동으로 기획해 희곡 모음집을 펴냈다.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기성 작가들의 희곡들을 모아 작품 모음집을 낸 것은 이례적이다. 2002년 제12회 국립극장 창작공모에 당선돼 공연으로 올려졌던 정영문 씨의 ‘당나귀들’ 외에는 모두 미발표작을 수록했다.
소설가 하일지 씨의 ‘파도를 타고’는 생존 경쟁에서 패배한 가장의 표류를 다룬 작품이다. 이 가장은 전 재산을 털어 배를 구입하고 온 가족을 배에 태워 어딘가로 떠난다. 부동산 투기, 종교 부패 등 부조리로 가득한 한국 땅을 떠나기 위해 격랑을 무릅쓰고 수개월간 항해했지만 그 결과 도착한 섬이 강화도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파도에 떠밀려 정처 없이 가야 하는 가족의 운명 등은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극화해 보여준다.
‘혜화동 1번지’에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를 연극으로 올리는 등 꾸준히 희곡을 써오고 있는 김경주 씨의 ‘블랙박스’. 비행기라는 고립된 공간에 탑승한 네 명의 승객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짚은 작품이다. 작품 말미에 비행기 사고에 대한 암시가 반전으로 등장한 뒤 구름이 사람처럼 기내로 들어와 앉는 등 환상성이 가미됐다. 비행기라는 소재의 상징성은 “바다에 고립되면 섬이고, 육지에 고립되면 성이고, 하늘에 고립되면 비행기지”라는 대사 속에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표제작인 서준환 씨의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는 성적인 판타지를 파는 섹스숍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정 씨의 ‘당나귀들’은 적군의 침입 소식에 왕이 도주해 버린 가상 왕국에서 장군, 신하, 학자들이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논쟁하는 모습을 통해 현재 한국 정치를 풍자했다.
이 희곡 작품집은 내년에는 시인 황지우, 소설가 김연수 씨 등 다른 문인들이 참여해 3권까지 시리즈로 출간될 예정이다. 장르의 벽을 넘나드는 작가들의 문학적 변신과 함께 희곡 읽기의 즐거움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