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있어 선운산 근동에 다녀왔다. 낙목공산(落木空山)을 앞두고 힘이 많이 사위었지만 오히려 울긋불긋 물든 덕에 산은 완상(玩賞)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헐벗으려는 나무들과 아직 물든 나무들이 섞인 산비탈에 비하면, 마을과 골목의 나무들은 잎을 거의 내려놓고 있었다. 분명 표고 높은 곳의 온도가 더 낮을 터인데도 산이 오히려 평지보다 생생했다. 자기들끼리 모여 있어 외롭지 않은 건 식생(植生)도 사람도 마찬가지인 건지,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선 나무의 낙엽색은 그래서 더욱 쓸쓸해 보였다.
이런 고즈넉함 속에 ‘신종 플루 마스크’라고 불리는, 얼굴의 반을 뒤덮는 마스크를 저마다 착용하고 산을 오르기 위해 무리를 진 일군의 등산객은 참으로 산에게 면목 없어 보였다.
근자에 전염성 병원균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산을 오르는 목적이 그것을 오감으로 느끼고 함께 숨쉬기 위해서라면, 대관절 등산길에서마저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리는 것만큼 허황한 것이 또 있을까 싶었다.
평생 걸려보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감기는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친숙하고 그렇기 때문에 공포심이 가장 덜한 병일 것이다. 하지만 하찮게 여기던 그 병이 어느 날 갑자기 국민적 호러가 되었다. ‘신종 플루’라는 이름을 달고.
어딜 가나 손 소독제가 비치되어 있고 예방법 포스터가 붙어 있다. 위중한 증상이야 필히 처방을 받아야 하겠지만,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지나간다는데도 다소의 극성맞음 속에 재채기 몇 번에 병원으로 달려가는 호들갑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도 자연도 순환하는 것이다. 겨울에는 놓아버리고 얇아지는 방법으로, 봄에는 취(取)하고 두꺼워지는 방법으로. 섭생(攝生)이란 그렇게 자연이 가진 치유능력으로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다. 헐벗은 나무가 그렇게 자기 몸을 드러내고 봄까지 외로움을 견디는 것을 바라보면, 인간에게도 한창의 신록만큼이나 잘 물든 낙엽색이 필요한 것을 느낀다. 차분히 다스려지는 것이 우리 몸에 깃든 병에만 해당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자연은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산을 앞에 두고, 그것의 쇠락과 융성을 앞에 두고, 어쩌면 인간은 자연보다 미개한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 새로울 것도 없는 반성을 해본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