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숙어가 외교 임무를 처리하고 축타가 종묘제사를 관리하며 왕손가가 군대를 통솔하고 있으니, 이러하거늘 어찌 그 군주가 지위를 잃겠습니까.
‘논어’ ‘憲問(헌문)’의 이 章에서 공자는 인재를 기량에 따라 임명해서 책무를 다하게 하는 器使(기사)야말로 정치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공자는 衛(위)나라 靈公(영공)이 無道(무도)하지만 외교, 전례, 군사의 일을 적임자에게 맡겨두었기 때문에 失脚(실각)할 리 없다고 했다. 위나라 영공은 일곱 살 때부터 42년간이나 군주로 있었으나, 부인 南子(남자)에게 빠져 정치에는 무관심했다. 결국 그가 죽은 뒤에 내란이 일어났다.
공자는 45세 때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에 들러 영공을 만났으나 공자를 예우하려던 영공의 뜻에 반대하는 자가 있어서 1년 남짓에 위나라를 떠났다. 뒤에 공자가 다시 위나라에 들렀을 때 영공은 軍陣(군진)의 일을 물었다. 공자는 軍旅의 일은 공부하지 않았다고 대답하고 위나라를 떠났다.
仲叔어는 앞에 나온 대부 公叔文子 즉 公叔拔(공숙발)이다. 외국 사절을 접대하는 大行人의 직역을 맡았다. 대부 祝타는 종묘제사를 관장하는 大祝(대축)의 직위에 있었다. 대부 王孫賈는 軍旅를 통솔하는 司馬(사마)의 직무를 맡았다. 治는 맡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夫如是는 ‘무릇 이러하면’이다. 奚는 ‘어찌’라는 뜻의 의문사다. 喪은 나라를 잃는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주자의 설을 따라 군주의 지위를 잃는 것으로 보았다.
공숙어 등은 결코 완전한 인격자가 아니었다. 공숙어는 인륜을 혼란시켰고 축타는 아첨을 하였으며 왕손가는 권력을 팔았다. 하지만 그들의 재능과 식견은 나라를 보존하기에 넉넉했다. 지도자의 德望(덕망)보다 器使(기사)가 중요함을 거듭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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