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부터 매주 화요일 게재하는 공연 리뷰 면에 새 코너 ‘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을 연재합니다. 다양한 공연에 대한 심층 분석을 담아냅니다. 망연자실(望演自失)이란 ‘공연을 보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잠시 넋이 나갔다’는 뜻을 지닌 조어입니다.》탕 탕 탕! … 일제의 허약한 영혼 헤집다
“이토를 쓰러뜨린 3발은 죽음의 윤리에 사로잡혀 있던 근대 일본 허구성 폭로한 생명 윤리의 외침이었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맞아 제작된 뮤지컬 ‘영웅’은 일곱 발의 총성으로 시작한다.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당시 쏜 총탄 개수를 상징한다. 하지만 일곱 발 중 이토에게 명중한 것은 세 발이었다. ‘영웅’과 비슷한 시기 대학로 소극장에 올라간 스튜디오 반(叛)의 창립 공연 ‘겨울꽃’(연출 이강선)은 이 세 발에 초점을 맞췄다. ‘쿵, 쿵쿵.’
연극은 이토를 암살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뒤 뤼순감옥에 투옥된 안중근(방윤철)을 향한 일본인의 시각에서 펼쳐진다. 그들에게 안중근은 불가사의한 존재다. 일본의 정계 원로를 쓰러뜨린 흉악범이지만 논리정연하기 이를 데 없고, 죽음의 문제에 너무 초연하기 때문이다. 극 초반 안중근은 소리와 그림자로만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에게 호기심과 두려움, 내면의 갈등과 혼돈을 불러일으킨다.
안중근을 향한 일본인의 시각은 4명의 인물로 형상화된다. 안중근의 무사 처형이 지상과제인 외무성 정무국장 구로키(이치형)는 효율과 경쟁을 추구하는 근대엘리트의 표상이다. 안중근을 다른 죄수와 달리 특별 처우하는 것에 반발하는 소가 간수장(이종윤)은 타자에 대한 차별과 적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근대적 야만을 상징한다. 안중근에 대한 무관심과 호기심이 교차하는 감옥의사 미야타(박정민)는 일본의 비주류 지식인을 대표한다. 마지막으로 미야타의 친구이자 안중근의 통역관인 구즈노키(박주용)는 안중근에게 동화되는 일본인을 대변한다.
이들 4인의 팽팽한 긴장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안중근을 감시하기 위해 그의 독방 곁에 붙여둔 모범수 다카키(허인범)가 ‘쿵, 쿵쿵’ 하는 소리가 자꾸 들려온다며 공포에 질려 자살한 것이다. 안중근은 그 소리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라고 말한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구즈노키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려온다.
안중근은 그 소리에 평온함을 유지하지만 구즈노키를 비롯한 일본인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총소리를 닮은 그 소리로 인해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다. 구로키 국장은 “현대는 강한 자만이 전부를 지배하는 시대, 즉 약자인 자체가 죄가 되는 시대”라며 그런 현상을 ‘피해망상’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아버지가 살해된 미야타는 이에 맞서 강함을 곧 정의로 규정하는 일본제국주의의 윤리적 허약성을 비난한다.
구즈노키는 그런 근대 일본이 초래한 ‘죽음의 윤리’에 사로잡힌 희생양이다. 그의 형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서 전사했고 그 형의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자살을 기도했다가 광기에 사로잡혔다. 안중근은 처형되기 직전 그런 구즈노키에게 그 소리는 죽음의 소리가 아니라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들은 심장박동 소리, 곧 생명의 소리임을 일깨워준다.
그 순간 안중근이 이토를 향해 쏜 총성 세 발의 의미가 뚜렷해진다. 근대 일본이 사로잡혀 있던 ‘죽음의 윤리’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새로운 ‘생명의 윤리’를 쓰기 위한 역설의 저항이었음이.
‘겨울꽃’은 일본 극작가 가네시타 다쓰오가 1997년 발표해 그해 기노쿠니야 연극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비록 일본 작가의 작품이고 80석의 초라한 무대였지만 제국주의 일본의 속살을 헤집은 ‘영혼의 가시’로서 안중근을 놀랍도록 깊이 있게 형상화해낸 점에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22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청운예술극장. 1만∼3만 원. 02-764-7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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