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소통]재외한국청년미술제-在佛화가 민정연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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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7일 03시 00분


“낯선 땅, 향수에 울지 않는다” 세계와 만나는 ‘예술 유목민’

지구촌 네트워크의 시대
한국인 정체성 찾기보다
다양한 체험 개성있게 표현
폴란드의 유대인 피아니스트 이그나스 스트라스포겔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으로 이주한다. 낯선 땅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그는 촉망받던 연주자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반주자로 추락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스웨덴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김지은 씨는 비디오 설치작업을 통해 불우한 이주자의 삶을 담담하게 조명한다.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면 한 쪽에 크기가 각각인 흰색 문이 보이고 다른 벽면에 영상이 펼쳐진다. 몽환적이고 초현실적 공간은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에바 신 씨의 멀티미디어 설치작품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날마다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고, 어느 쪽을 선택해도 불안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 전당이 12월 6일까지 한가람미술관(02-580-1300)에서 마련한 ‘2009 재외한국청년미술제-U·S·B’전에서 만난 작품들이다. 각기 다른 국제적 배경을 가진 세계 속의 한인 신진 작가 24명을 소개하는 전시다. 독일 미국 영국 일본 중국 프랑스 등 8개국에서 부지런히 활동해온 작가들이나 국내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이들 중에는 교포도 있지만 유학과 이주 등으로 유목의 삶에 자발적으로 뛰어든 경우도 많다.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고국을 떠나야했던 이전 세대와 달리 이들의 이주와 이산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어서 차별화된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아리랑 꽃씨’전이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주목했다면 이 전시는 향수에 젖지 않는다.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면서 국가와 지역의 범주가 무너지는 ‘21세기형 디아스포라(이주, 이산) 아티스트’의 세계를 짚어내기 때문이다.

○ 이질감과 다양성

“이번 전시는 젊은 작가들의 이동성 유동성, 그리고 탄력적 문화적 수용을 보여주면서도 탈(脫)정치화되어가는 문화적 맥락에서 작가의 특이성을 강조한다.”(정연심 홍익대 교수)

휴대용 저장장치를 의미하는 전시 제목 ‘USB’는 ‘이동성과 연결성’이란 주제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실내와 야외를 두루 활용한 전시는 설치작업을 다수 선보여 볼거리가 풍성하다. 권대훈 씨의 ‘숲에서 길을 잃다’는 양쪽 벽에 촘촘히 박힌 금속 조각이 어둠 속에서 신비한 숲의 이미지를 빚어낸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생기는 두려움의 허상을 상징한 작업. 길초신 씨는 관객의 비밀이 담긴 편지를 넣고 봉한 콘크리트 공과 런던에서 가져온 빈티지 벽돌로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재일교포 3세 오아사 씨의 설치작업에는 자신과 타인을 빗댄 여자아이와 토끼가 등장해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다양한 사회를 체험한 작가들은 여러 형태와 재료를 사용해 개성적 작품을 선보인다. 말린 찻잎을 이용해 이미지를 만든 이창원 씨, 조각 받침대와 사진의 배경 촬영지를 작품으로 등장시킨 최선아 씨, 목탄과 에칭을 사용한 애니메이션의 이가경 씨, 유럽인의 머리카락을 염색해 카펫의 무늬를 새긴 이세경 씨, 포장할 때 쓰는 잠금장치로 작품을 만든 장홍선 씨, 일명 ‘몸뻬 바지’로 나무 형상의 구조물을 만든 이원호 씨 등. 그들의 독창성과 현대미술의 다양성이 녹아든 작품은 신선한 매력을 발산한다.

○ 지역성과 국제성

파리에 거주하면서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고, 해외에서 활동하다 국내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해외에 기반을 둔 젊은 작가들의 활동영역은 이렇듯 광범위하다. 12월 6일까지 서울 종로구 팔판동 공근혜 갤러리(02-738-7776)에서 ‘불안한 아름다움’전을 여는 재불 화가 민정연 씨도 그런 경우다. 유기적 형태와 건축적 구조, 일상과 상상의 풍경이 뒤섞인 기이하고 낯선 공간을 매혹적으로 표현하는 작가. 뉴욕 취리히 파리에서 개인전을 갖는 등 해외에서 인지도를 쌓고 있다.

지구촌의 도시들을 오가며 다채로운 문화를 접하고 작품활동을 하는 젊은 작가들. 주눅 들지 않고 세계화된 세계에서 꿈을 펼치는 1세대 예술 유목민의 앞날이 궁금해진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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