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는 것은 세상과는 등지고 내실에 거하여 산아(産兒)와 침공(針工)하는 기계적 생활을 지속하여 왓숨은 현존한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다. 재래에 여자는 품격이 고결하고 신망이 잇다는 사람일사록 인간의 반열을 떠난 우마(牛馬)이며 기계이었다. (…) 여자 자신들의 무지 몰각성의 탓이라고 하겠다.”
―동아일보 1926년 10월 11일자》
“男중심 인습에 반기” 자유연애-정조 이슈 핵가족 논의도 등장
‘신여성’은 1920년 초반 여성을 위한 중등교육이 실시돼 여성 지식인이 등장하면서 사회적 담론으로 등장한 용어였다. 구질서의 봉건성을 극복하는 데 ‘신여성’의 존재는 성 결혼 가정생활의 변화에 있어 큰 상징성을 띠었다.
신여성은 전근대적 사회를 근대로 개조할 주체이기도 했다. 1926년 1월 14일 동아일보에 실린 신여성 단체 ‘조선여성동우회’ 소개 기사는 이 단체가 “제도와 인습에 반기를 들고 사람으로서의 여자를 추구한다”고 전했다.
이즈음 신여성들이 각성해 해방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촉구하는 담론이 쏟아졌다. 동아일보에 외부 기고로 1926년 10월 11일부터 5회 연재된 ‘자기 해방을 망각하는 조선의 신여성’은 “남녀평등자유, 즉 여자의 생존권 확립은 생각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를 위하여 투쟁 또는 활약하지 안을 수 업다. 다시 말하면 여자들 자신이 계급을 위하여 분투노력하는 가운데 어시호(於是乎) 동일한 지위에 권위 잇는 생을 향(享·누릴)하여 인간성을 발휘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남녀평등과 여성의 적극적 역할이 강조되면서 자유연애와 정조(貞操) 문제도 큰 이슈가 됐다. 1927년 3월 이화여전 학생인 유영준은 “정조 파멸이 늘어갈 것은 정조에 관한 근본적 관념의 표준이 달라진 것이 큰 원인이겟다. … 이것은 부패도 아니요 타락도 아니다. 남성 본위의 성도덕으로부터 인간을 본위로 한 공평하고 순리적인 성도덕으로 진보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필명 ‘광산’은 동아일보에 그해 4월 2일부터 7회에 걸쳐 ‘신여성의 정조 문제’를 게재하며 유영준의 글을 비판했다. 그는 남녀 모두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영준은 곧 동아일보에 ‘광산 씨의 신여성 정조론’을 4회 연재하며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재반박했다.
한편에선 신여성을 가정생활과 연결한 ‘신가정’이라는 개념도 나왔다. 동아일보는 1929년 4월 10일부터 여성 지식인의 기고를 받아 ‘신여성의 가정생활-이것이 불평(不平)이라면’ 시리즈를 14회 연재했다. 첫 회를 기고한 박경희는 “어른 미테서 기를 못 펴고 하고 십흔 일을 못하기 때문에” 대가족 제도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신여성이 주도하는 신가정은 부부와 미혼의 자식만으로 이뤄진 ‘핵가족’을 의미했다.
광복 후 산업화를 거치며 핵가족과 양성평등은 우리 사회의 당연한 모델로 받아들이게 됐다. 모든 면에서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 여성을 뜻하는 ‘알파걸’이라는 말도 시대의 화두가 됐다. ‘여자의 생존권 확립’을 외쳤던 시대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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