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 시대’ 유감옛날 사람들은 스트레스 없이 잘 살았다고 한다. 이유인즉 ‘스트레스’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감 유감을 이야기하면서 옛날에는 ‘독감’이라는 말이 없었기에 옛사람들은 독감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해도 될까.
독감은 근대 이후에야 널리 퍼진 말로 보인다. 독감과 유사한 말로 옛 문헌에 상한(傷寒), 감모(感冒), 풍한감기(風寒感氣) 등이 전하고 있다. 특히 상한은 급성열병 따위의 호흡기 전염병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굳이 대응시킨다면 상한이 독감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런데 의약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독감은 여전히 우리를 주눅 들게 한다. 병리학적인 이유가 여럿이고, 의학적인 예방법 또한 갖가지다. 그러나 정작 의약적인 예방과 치료는 불안한 모양이다. 과학이 덜 발달해서일까, 아니면 현대의약의 한계일까. 나는 그 원인을 다른 데서 찾는다. 현대문명이 안고 있는 특성과 그것에서 비롯된 심리적인 요인에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인간의 문명은 시간을 극복하려는 도전의 역사이다. ‘좀 더 빨리’를 외치면서 자연적인 시간을 극복하고 마침내 오늘과 같은 현대적 시간주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빠른 시간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전히 애쓴다. 그 결과 현대인의 생활주기는 현대의 쾌속적인 시간주기 속에 맞춰져 있다. 생체리듬을 인위적인 시간에 맞추다 보니 본디부터 가진 생체주기가 깨지고 말았다는 뜻이 된다. 현대의 인위적인 시간주기를 잘 쫓아가는 사람은 성공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독감은 이러한 시간주기 속에 끼어든 바이러스다. 현대문명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다.
느림의 미학을 굳이 들지 않아도 좋다. 자연의 시간성을 거슬러 무한질주와 쾌속적 변모를 좇는 한 독감과 같은 바이러스는 창궐하게 마련이다. 제주도에서의 올레길 걷기 같은 운동이 바로 바이러스를 막는 길이다. 강화도에서는 ‘심도기행’을 따라 옛길을 걷고, 충청도에서라면 보부상이 걸었던 옛길을 따라 걸어도 좋을 성싶다.
이런 운동은 현대인의 삶과 주기를 잠시나마 멈추고 생체리듬을 회복시키는 운동이다. 그럴 때 생체를 흔들 만한 바이러스가 침입할 여지는 없다. 본디의 생체리듬을 회복한다면 인간의 몸은 독감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독감 유감은 독감이 유감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독감이 창궐한 시대성에 유감이라는 말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