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주(穀酒) 맛이 늘 그렇지만 소곡주는 더더욱 부드럽다. 끈적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몇 순배 돌다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술기운이 순식간에 온몸에 퍼지고 맥박이 빨라진다. 취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오죽하면 ‘맛과 향에 취해 일어나지 않으려다 일어나려 해도 못 일어난다’고 했을까. ‘앉은뱅이 술’이라는 애칭이 붙은 연유다.
하지만 이런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술이 깬다. 그만큼 뒤끝이 개운하다.
“애지중지 가꾼 밀과 찹쌀, 멥쌀을 재료로 하고 정성으로 빚기에 가능한 일이죠.”
국내 유일의 소곡주 명인인 우희열 씨(74·여·충남무형문화재 제3호)의 얘기다. 소곡주는 온유하고 부드럽기에 ‘백제의 술’이라고도 부른다. 은은한 미색 빛깔은 마치 백제인의 미소를 닮은 듯하다.
“멸망한 백제의 한을 달래기 위해 하얀 소복을 입고 빚었다 해서 소곡주(素3酒)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마을 뒷산인 건지산 맑은 약수로만 빚어야 이런 맛이 납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건지산 자락. 모시의 본고장인 이곳이 바로 소곡주의 본고장이다. 문헌에 의하면 소곡주는 나라 잃은 백제 왕실과 유민이 건지산에서 백제 부흥을 꿈꾸며 주류성을 쌓고 슬픔을 달래기 위해 빚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무왕 37년(636년) 3월에 조정 신하들과 부여 백마강 고란사 부근에서 소곡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1400년 역사로 현존하는 한국 전통주 중 가장 오래된 술인 셈이다.
우 씨는 “100일이 지나야만 제맛을 내기에 ‘백일주’라고도 부른다”며 “모든 재료는 직접 또는 계약 재배한 것만 사용한다”고 덧붙였다.
소곡주는 가을볕에 말린 들국화가 들어간다. 들국화의 독특한 향이 배어 있는 알코올 농도 18도의 최고급 곡주다. 소곡주를 빚는 과정은 이렇다. 먼저 쌀을 찐 후에 누룩을 넣고 밑술을 만들어 3일 정도 발효시킨다. 밑술은 또다시 최고급 찹쌀로 만든 지에밥과 한몸을 이루며 덧술로 바뀐 뒤 15도 저온 항아리에서 100일간 발효 숙성된다. 메주콩과 엿기름도 들어간다. 우 씨는 그 위에 ‘잡귀’를 쫓는다며 홍고추를 꽂아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충남 부여가 고향인 우 씨는 27세 때 서천 이곳으로 시집 와 처음 소곡주를 만났다. 친정집에서도 술을 빚었지만 시어머니 김명신 씨(1997년 작고)로부터 배운 소곡주는 주조 기법이 까다롭고 정성 없이는 제맛을 내지 못했기에 여간 고생한 게 아니다.
처음엔 김 씨가 가용주(家用酒)로 소곡주를 빚었다. 그러던 중 지나던 사람들이 이 집 소곡주를 맛보며 감탄했고 입소문을 타면서 1979년 선조들로부터 전수받은 제조 기법으로 충남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받았다. 1988년에는 전통식품 명인으로 지정받고 제조 면허를 취득하면서 소곡주는 드디어 세상에서 빛을 봤다.
1997년 시어머니 김 씨가 작고하자 우 씨는 전통식품 명인과 무형문화재를 고스란히 승계 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산면 일대에서는 소곡주를 빚는 가구가 200여 집에 이른다. 이들도 모두 건지산 약수만을 사용한다. ‘한산소곡주’라는 공식 상표로 출시되는 곳은 우 씨 집뿐. 올 추석 때 처음으로 청와대에 도자기형 4000세트가 납품돼 2주 만에 모두 팔렸다.
소곡주에 얽힌 전설도 많다. 조선시대 때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이 소곡주의 향과 맛에 취해 과거를 놓쳐 버렸다는 얘기도 있다. 술을 빚던 새색시가 술맛에 반해 젓가락으로 찍어 맛보다가 취해 시아버지 앞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는 이야기는 실소를 자아낸다.
그만큼 소곡주의 향과 맛은 그윽하다.
우 씨 집 뒤편 창고 땅속에 묻혀 있는 술독은 군데군데 메운 흔적이 역력하다. 세월의 무게가 실려 있다. 그러다 보니 산소가 필요 이상으로 공급돼 맛이 변하기도 한다. 소곡주의 인기가 높아지고 현대화 필요성이 제기되자 아들 나장연 씨(44)가 도시 직장생활을 접고 아예 귀향했다. 지금은 우 씨로부터 제조 기술을 거의 전수받았다.
나 씨는 좀 더 과학적이고 위생적인 소곡주를 추구한다. 올해 안으로 현대식 주조 설비가 완료되면 이 꿈이 실현된다. 제품도 18도 전통약주와 이를 증류한 불소곡주(43도)를 비롯해 신세대 감각에 맞춘 13도짜리 등이 생산된다. 포장도 다양화해 세계 시장에 내놓을 포부다.
나 씨는 “전통주에 적합한 곡류의 품종 개발에 정부가 나서줘야 한다”며 “특히 전통주가 갖는 기능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세계 시장에서 설득력을 지녀야 한다”고 덧붙였다.
“제사나 차례상에서 일본 술 정종이 사라질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우리의 전통주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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