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 힘겹게 세상을 살았지만 다행히도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았다. 오랜 세월 곰삭은 김치처럼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친구가 있고 해외에 다니면서 새로 사귄 친구도 있다.
암 수술 직전까지 치료 목적으로 홍콩을 매달 다녀왔는데 병원에서 91세의 ‘마담 탕’을 알게 됐다. 홍콩의 유력인사인 마담 탕은 병원에서 내 영어발음을 유심히 듣더니 말을 걸어왔다. 영어를 어디에서 배웠느냐고 묻기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대학 공부를 했다고 하니 자기도 마찬가지라면서 학교며 지역에 대해 한참 얘기를 나눴다.
그렇게 친해져서 홍콩에 갈 때면 식사를 같이 하고 밀린 담소를 나눴다. 올봄 홍콩에 다녀온 이후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느라 한동안 안 갔더니 마담 탕은 애경홍콩유한공사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어와 “마담 장이 왜 소식이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내 소식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며 병원으로 안부전화를 걸어왔다.
마담 탕은 이후에도 몇 차례 통화를 했는데 지난달에는 아예 한국으로 문병을 왔다. 마담 탕은 미국에 있는 82세와 78세 된 여동생까지 모두 이끌고 휠체어를 탄 채 한국에 왔다. 미국 워싱턴에서 고위 관료를 지낸 마담 탕의 조카가 할머니 세 분을 모시고 왔다. 91세의 노구를 이끌고 나를 문병하려고 홍콩에서 달려온 마담 탕 가족의 진한 애정에 나는 참 인복이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 회사일은 보지 않지만 우스갯소리로 노는 데도 참 바쁜 나날을 보낸다.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을 빼고는 매일 아침 오래된 습관처럼 집무실에 7시 반 이전에 어김없이 출근한다. 책상에 앉으면 먼저 e메일을 확인한다. 일본과 미국 등 여러 친구와 e메일을 자주 주고받는다. 읽는 즉시 바로 답장을 하는 편이다. 아플 때 안부를 묻거나 위안이 되는 e메일을 많이 받았는데 몸이 좀 괜찮을 때면 답장을 쓰곤 했다. 한글 타이핑은 느리지만 영문 타이핑은 여전히 빠른 편이다.
현직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 나갈 때 주로 혼자 다닌다. 한 번은 외국 항공사 매니저가 내게 “존경한다”면서 “한국의 기업 회장 가운데 수행원을 한 명도 안 데리고 다니는 분은 처음 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직 젊으니까 그렇지요. 나도 더 늙으면 의지할 수밖에 없지요” 하면서 웃었다. 공항 VIP룸 사용카드가 있지만 아직 써본 적이 없다.
결재도 하지 않은 지 오래 됐다. 큰 이슈가 있으면 사장단 회의에 가끔 참석한다. 참석해도 지금까지 아이들이 해보겠노라는 일에 한 번도 ‘노’라고 해본 적이 없다. 다만 참고할 만한 의견은 꼭 얘기해 준다. 그래봤자 “결단을 내렸으면 성공할 수 있도록 노력해라”는 정도의 의사표시가 전부다. 참견하기 시작하면 그건 은퇴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내 인사도 절대 참견하지 않고, 보고하면 그냥 들을 뿐이다. 이제 치료도 마치고 건강도 되찾았다. 앞으로는 음악회도 다니고 영화도 보고 외국어 공부도 더 하고 싶다. 취미모임이 많다는데 그런 데에 좀 나가야겠다.
일만 보고 달려온 지난 삶 보람
취미생활-외국어 더 배우고 싶어
사회 경쟁력 위한 여성 역할 기대
나의 삶, 나의 길을 되돌아보니 한마디로 ‘일에 매진한 한 길 인생’이 아니었나 싶다. 만약 그렇지 않고 쉽게 살았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도 해본다. 우리 사회가 서서히 변하고 있고 여성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여성의 사회활동 폭이 넓어지려면 남성 위주의 사회 틀을 더 벗어나야 한다. 여성도 정책수립 등 중요한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은 사회에서 성장하고 싶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더 노력해 그 분야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키워봤으므로 남성에 비해 더 섬세하고 다정하며 인내심과 모성애라는 장점이 있다. 이런 경쟁력을 잘 활용해 사회생활을 한다면 어떤 어려운 목표도 성취할 수 있다. 남성 위주의 사회구조에서 여성도 함께할 수 있는 사회로 만드는 데는 여성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대한민국의 으뜸가는 고귀한 재산은 사람이다. 생산성이 높고 우수한 인재가 많다. 절반은 여성이다. 이처럼 큰 재원이 적재적소에서 일익을 담당할 때 세계 속에서 경쟁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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