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우연이 필연이 되기엔 2% 부족한…오페라 ‘운명의 힘’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24일 03시 00분


운명이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자칫 공허해지기 쉬운 개념이다. 사건의 복잡한 인과를 생략한 채 결국 그렇게 되어진 것이라는 허무주의적 결과론만을 전달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운명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남다른 우연에 더해 피 마르는 절박함이 필요하다.

서울시 오페라단이 19∼22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 ‘운명의 힘’은 주연이나 조연급의 가창, 합창, 관현악, 무대에 있어서 이 오페라단이 축적해온 넉넉함과 호화로움이 흘러넘친 무대였다. 반면 이 오페라의 주제가 요구하는 절박함은 그만큼 깊이있게 표현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21일 오후 7시 반 공연에 출연한 남성 주연 두 사람은 1990년대 한국 남성 성악의 대명사로 군림한 바리톤 고성현 씨(돈 카를로)와 테너 김남두 씨(돈 알바로). 두 사람의 전성기를 언제로 정의할 수 있을까. 이날 공연으로는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김남두 씨는 예전에 종종 지적됐던 음성연기의 단조로움을 상당 부분 벗어났다. 짙은 빛깔로 뜨겁게 타오르는 고성현 씨의 쩌렁쩌렁한 호령도 여전했다. 청순함의 표현과 극적인 힘이 동시에 필요한 레오노라 김인혜 씨도 적역이었다. 3막 수도원 장면에서는 힘이 떨어졌지만 4막의 아리아 ‘주여 평화를 주소서’는 적절한 기복과 호소력으로 와 닿았다. 피아니시모로 노래하는 B플랫 고음의 ‘invan la pace’에서는 잠시 불안정함이 엿보이기도 했다.

이날 주목을 받은 출연진으로 수도원 문지기 멜리토네를 노래한 바리톤 우범식 씨를 빼놓을 수 없다. 가사에 착 달라붙는 발성과 넉넉한 볼륨 등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었다.

정갑균 연출은 2007년 시작한 ‘베르디 빅5’시리즈에서 원작을 중시하는 연출로 인정을 받아왔다. 이날 무대도 물량공세를 펼치기보다는 벽체의 정교한 질감으로 현실감을 주었다. 3막 전쟁 장면은 무대 후면의 바위 조형물 뒤편에서 전개되는 것으로 처리해 간단히 효과를 높였다. 그러나 주연 남자들의 연기, 특히 팔을 이용한 상반신 연기는 정해진 공식에 의존해 단조로웠다.

최승한 씨가 지휘한 서울시교향악단의 앙상블은 정밀했다. 넉넉하게 밸런스를 잡아나갔고 목관의 색채가 생생한 질감으로 살아났으며 무대 위 가수들과의 호흡도 좋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중기 베르디 특유의 극적인 표정이 아쉬웠다. 서곡 피날레 직전 금관의 반음계 상승 음형이나, 3막 전쟁의 합창 직전 고꾸라지는 듯한 극적인 하행 음향은 무대 위와의 호흡도 배려할 필요가 없는 부분인 만큼 한층 단호한 강약대비를 보였으면 좋았을 듯하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