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연극은 끝없이 묻는다… 연극이 대체 뭐냐고

  • 동아닷컴
  • 입력 2009년 12월 1일 03시 00분


《‘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은 다양한 공연에 대한 심층 분석을 담아낸 코너입니다. 망연자실(望演自失)이란 ‘공연을 보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잠시 넋이 나갔다’는 뜻을 지닌 조어입니다.》

재일교포 정의신 연출 ‘바케레타!’
지방 연극단원들 희로애락 그려
대본 ★★★ 연기 ★★★★


채승훈 연출 2인극 ‘출구와 입구’
‘인생과 일치하는 연극’ 형상화
대본 ★★★★ 연기 ★★★★



연극만큼 자의식이 뚜렷한 장르가 있을까. 연극은 끊임없이 연극 자신에 대해 말한다.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막을 내린 극단 중앙연극의 ‘바케레타!’는 연극인들에겐 크리스마스 선물과 같은 작품이다. 아무리 누추한 연극이라도 밤하늘 눈송이 같은 축복일 수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재일교포 작가 정의신이 작·연출을 맡은 이 연극은 학교 귀신 소동을 소재로 어린이뮤지컬을 준비 중인 지방 소도시 극단의 이야기다. 극단의 대표이자 작가 겸 연출가인 민규(이원승)가 폐암에 걸리면서 뮤지컬 ‘고스트-학교귀신’은 좌초 위기에 빠진다. 민규의 옛 애인인 여배우 혜주(배종옥)가 대신 연출을 맡지만 빈자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민규의 현재 애인인 조연출 미희(서주희)의 마음은 민규가 누워 있는 병실로만 달려가고, 일상에 짓눌린 단원들 역시 삶과 연극을 병행하기가 벅차다.

그들이 무대에 올리겠다는 작품도 볼품없다. 학교 화장실에 귀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러 출동한 교사들이 진짜 귀신을 만나 혼비백산한다는 내용. 귀신과 도깨비로 억지 분장을 한 단원들의 과장된 연기와 대사를 실제 무대에서 봤다면 쓴웃음밖에 안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 편의 공연을 위한 가난한 연극단원들의 애면글면한 분투를 함께 지켜보는 관객은 눈물 섞인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단원들이 뮤지컬 ‘오즈의 마법사’의 주제곡 ‘오버 더 레인보’에 맞춰 추는 귀신 군무에 배꼽 빠지게 웃지 않을 수 없다. 병색이 완연한 민규가 연습장을 찾아와 “뽀얗게 먼지 쌓인 소품 냄새, 낡아서 곰팡이가 슨 듯한 의상 냄새, 대본 잉크 냄새, 바닥에 스며든 땀 냄새…연극 냄새가 나, 꿈 냄새”라고 말할 때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바케레타는 귀신을 뜻하는 일본어 ‘오바케’와 희가극 ‘오페레타’의 합성어. 지극히 통속적인 이야기란 뜻이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작품에 풍성한 생명력을 집어넣은 것은 삼류배우 연기를 위해 민망한 연기를 마다하지 않은 일류배우의 힘이었다.

같은 날 서울 대학로 정보소극장에서 역시 막을 내린 극단 창파의 2인극 ‘출구와 입구’(연출 채승훈)는 세상을 구원할 성스러운 그 무엇으로서 연극에 바치는 송가(頌歌)다. 배경은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1950, 6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이란 비루한 현실을 극무대로 옮기려는 젊은 작가(김은성)는 노배우 앙드레(이호성)와 두 번의 만남을 회상한다.

첫 만남에서 연기 인생 30주년 기념작으로 ‘오이디푸스 왕’을 연기한 앙드레는 “연극이 우리 국민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젊은 시절의 포부와 연극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을 토로한다. 그러나 5년 뒤 마룻바닥을 닦는 추기경 역을 맡은 앙드레는 영화관 매표원으로 전락한 삶을 토로하며 겸손하면서도 진실한 연기에 눈을 떴다고 고백한다.

극작가 에이솔 푸가드의 분신인 작가는 그런 그에게 인종차별을 극화하겠다는 꿈을 밝힌다. 처음엔 만류하던 앙드레는 작가의 진심을 깨닫고 자신이 젊은 시절 존경하던 작가에게서 들은 말을 전한다. “자네가 목적하는 바의 불꽃을 지펴. 될 수 있는 한 그 불꽃이 크고 밝게 타오르게 하라.” 하지만 이미 삶의 의욕을 상실한 앙드레는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명대사를 자신의 삶에 투영시키며 끝내 숨을 거둔다.

앙드레의 인생은 곧 연극과 삶이 하나 된 경지를 상징한다. 그의 연기엔 곧 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작가 역시 연극과 삶의 일치를 꿈꾼다. 하지만 그것은 연극에 삶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삶에 연극을 맞추는 일치다. 그래서 제목이 ‘출구와 입구’다.

국내 초연인 두 작품은 모두 연극에 바치는 연극이다. 하나는 가장 통속적 연극을 통해 희극적 어조로, 다른 하나는 최고의 고전에 빗대 비극적 어조로 말하지만 그 메시지는 같다. 연극이여, 영원하라.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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