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丘는 어찌 이리도 안달하는가, 말재주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공자가 말했다.
“감히 말재주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고집불통을 미워하는 것이다.”
공자의 시대에는 세상과 絶交(절교)한 사람이 많았다. 微生畝(미생묘)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어느 날 그가 공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대는 허둥대고 안달하는데, 말재간이나 부려 세상에 쓰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고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공자는 자신이 결코 말재간을 부려 세간에 아첨할 뜻은 없지만 그렇다고 혼자만 깨끗하다고 여기는 固陋(고루)한 태도는 미워하므로 이럴 따름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는 ‘논어’의 ‘憲問(헌문)’에 나온다. 공자는 미생묘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본심을 말했다. 정말, 덕을 쌓는 사람은 벼슬함 직하면 벼슬하고 그침 직하면 그치는 時中(시중)의 도리를 따르지, 隱居(은거)하여 獨善(독선)의 태도만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丘는 공자의 이름이다. 栖는 새가 나무에 머무른다는 뜻으로, 棲와 같다. 하지만 栖栖는 악착스럽게 군다는 뜻의 숙어다. 棲棲로도 적는다. 無乃∼乎는 ‘아무래도 ∼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는 표현이다. (녕,영)은 말재간, 즉 口才다. 疾固의 疾은 미워함, 固는 固陋함이다.
‘예기’에 보면, 사람으로서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공자는 한시도 쉬지 않고 옛 도를 널리 물어 배우려 하여, 마치 구하다 얻지 못하는 사람처럼 허둥댔다. 그렇기에 일본의 太宰純(다자이 준)은 공자가 배우기를 게을리 하는 태도를 고루하다고 배격하고 부지런히 道를 추구했다고 풀이했다. 정약용은 이 해설이 참 좋다고 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악착스럽다는 말은 욕이 될 수가 없다. 지금 공자는 우리에게 나른함에서 떨쳐 일어나라고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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