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느닷없이 이해인 수녀(64)의 와병과 절필 소식이 전해지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한번 찾아뵙고 싶다는 청을 넣었다. 하지만 면회는 물론 전화 통화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지인들을 통해 “모처의 병원에서 힘든 항암치료를 받고 계시다”는 얘기만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민들레 수녀님’은 민들레 홀씨처럼 사라져버리셨다. 그렇게 1년 반가량이 흘렀다.
얼마 전, 축복처럼 해인 수녀를 만났다. 피아니스트 노영심 씨(42)를 따라나섰다가 한 수녀원에서 요양 중인 수녀님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20여 년간 모녀처럼 지내 온 두 사람은 정성이 가득 담긴 작고 아름다운 선물을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해바라기 연가’(이해인 시낭송/노영심 피아노)라는 CD도 함께 만들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왔느냐”며 책망하는 수녀님께 차마 인터뷰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그저 수녀님이 뵙고 싶어서 왔다”고만 했다.
―건강은 어떠신가요.
“지난해 여름, 첫 서원 40주년을 맞아 엄마에 대한 원고를 넘기고 나서 속이 불편해 장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암이 발견됐어요. 순간적으로 당혹스럽고 눈물이 핑 돌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였지요. 1, 2기가 지난 상태여서 수술을 했고 그동안 방사선 치료 28번, 항암치료 30번을 받았습니다. 요즘도 하루에 약을 열 알 넘게 먹으며 정기적으로 체크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라고 생각하며 지냅니다.”
해인 수녀의 사모곡인 책 ‘엄마’는 지난해 8월 15일 샘터에서 출간했다. 엄마 편지의 첫말은 늘 “귀염둥이 작은 수녀 보아요”였고, 딸 편지의 마지막 말은 “엄마 딸 해인이에요…”였다고 한다. 열아홉에 이씨 집안으로 시집온 수녀님의 어머니는 1남 3녀를 두었고 이 중 두 딸이 수녀가 됐다. 열세 살 터울인 해인 수녀의 언니는 봉쇄수녀원인 가르멜수녀원에서 수도 중이다.
―남들에게 위안이 되는 시를 많이 써오셨지만 무척 힘드셨을 텐데….
“예, 정말 많이 아플 때는 기도하기도 힘들었어요. 환자들한테 함부로 고통을 참으라고 할 게 아니더라고요(웃음).”
김 추기경과 같은 층 입원
항상 남 배려하던 모습 또렷
아프니 감사할 일 더 많아져
―올 들어 김수환 추기경님, 화가 김점선 씨, 서강대 장영희 교수 등 수녀님이 존경하고 아끼고 사랑했던 분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추기경님과는 병원에서 같은 층을 썼어요. 어쩌다 제가 병실에 가서 안수기도를 청하면 ‘이 수녀가 아름다운 시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많이 주었으니 할 만하시면 좀 더 세상에 머물러 시로써 당신 영광을 드러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 주셨죠. 힘든 가운데서도 늘 남을 먼저 배려하는 그분의 모습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항암치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뵙고 올까 하다가 그냥 왔는데 그게 마지막이 됐어요. 교회 안팎의 신문에 추모시 몇 편을 싣는 것으로 추도의 마음을 대신했지요. 점선이 빈소에는 다녀왔는데 영희 빈소에는 치료 받느라고 못 갔어요.”
수녀님은 잠시 서가를 뒤적이더니 책과 탁상시계 등 두 점을 가져왔다.
‘기쁨이 열리는 창’(마음산책·2004)이란 수녀님의 산문집 첫 장을 넘기자 ‘인격 장애 김점선을 교화 노력 중인 이해인 닭띠 언니에게-개띠 점선’이라고 적혀 있다. 김점선답다. 수녀님의 글방 벽에는 그가 그린 그림 2점도 걸려 있다. 한 손에 들어가는 하트 모양의 시계는 장영희 교수가 수업시간에 강의실에 들고 다닌 유품으로 가족들이 보내왔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과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같은 환우로서 한 말씀….
“제 경우 아프고 나서 오히려 매사 감사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지금 이 순간에 더 충실하게 됩니다. 전에는 종이에 시를 썼다면 지금은 삶 자체에 시를 쓰는 느낌으로 삽니다. 내면의 행복지수가 더 높아졌다고 할까요.”
―하루 일과는….
“공동체에서 여러 가지로 배려를 해 주셔서 남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고 일찍 잠자리에 들지요. 많은 분들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위로 편지도 보내 주셔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시간여 대화가 오간 뒤 수녀님은 저서 두 권에 아름다운 꽃 모양을 만들어 친필 사인을 해주었다. 신작시 한 편에 수녀님의 요즘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새로운 맛
물 한 모금 마시기/힘들어하는 나에게/어느 날/예쁜 영양사가 웃으며 말했다//물도/음식이라 생각하고/천천히 맛있게 씹어서 드세요//그 이후로 나는/바람도 햇빛도 공기도/천천히 맛있게 씹어 먹는 연습을 하네/고맙다고 고맙다고 기도하면서//때로는 삼키기 어려운 삶의 맛도/씹을수록 새로운 것임을/다시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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