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혼탁한 세상, 선비에게 삶의 道를 묻다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5일 03시 00분


참자아 완성-타자의 성취 추구한 선비정신 재조명
義를 위해 선택한 죽음서 인간의 본질적 가치 발견

시대를 초월한 선비정신을 찾기 위해 저자는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과 삶을 모델로 삼았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시대를 초월한 선비정신을 찾기 위해 저자는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과 삶을 모델로 삼았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선비/김기현 지음/488쪽·2만5000원·민음사

《우선, 유학자와 선비는 다르다. 모든 유학자가 선비는 아니다. 유학자 중에는 밤이면 남몰래 동네 과부를 찾아다니는, 연암 박지원의 소설 호질(虎叱)에 등장하는 북곽 같은 이도 분명 있었다. 전북대 사범대 윤리교육학과 교수인 저자에게 선비란 ‘참자아의 완성과 타자의 성취라는 목표를 잃지 않은 유학자’다. 진리와 도의로 참자아를 완성하고 나아가 타자까지도 그렇게 성취시켜주는 사람이다. 사유문법과 언어감각이 다른 조선과 현대의 시대적 간극을 넘어 선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리학 시대의 합리와 가치는 오늘날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람들은 선비정신을 그리워한다. 그것은 군신유의니 남녀유별이니 하는 봉건적인 가치관이 그리워서가 아니다. 조선시대 선비를 통해 이 시대 정신의 지표를 찾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 선비에 대한 오해


흔히 사람들은 선비의 학문을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출세 수단’으로 여긴다. 그러나 입신양명은 본래 ‘자아를 확립해 진리와 도의를 행함으로써 이름을 후세에 알린다’는 뜻으로, 선비는 자신의 학문이 당대에 인정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선비에게 학문이란 기본적으로 참자아의 완성을 위한 공부였기 때문이다.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해 그것을 상품으로 내놓는 지식인상과도 거리가 멀다. 선비는 이런 활동을 “귀로 들어 입으로 풀어먹는 학문(구이지학·口耳之學)”이라며 천시했다. 예학에 밝았던 조선 중기 명문장가 한강 정구(寒岡 鄭逑·1543∼1620)는 선비상에 대해 “온몸으로 인식하고(체인·體認) 온몸으로 성찰하고(체찰·體察) 온몸으로 시험하고(체험·體驗) 온몸으로 실천(체행·體行)한다”는 사체(四體)의 정신을 강조했다.

○ 죽음과 삶

매천 황현(梅泉 黃玹·1855∼1910)은 한일강제병합 이후 절명시 한 편을 남기고 자결한다. 그의 절명시 마지막은 ‘세상에서 문자 아는 사람 되기가 참으로 어렵구나’였다. 문자 아는 사람(식자인·識字人)으로서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그만큼 컸다.

여기에는 자신의 죽음을 존재의 부정으로 여기지 않고, 후손에게 새로운 긍정을 전망토록 한다는 존재연쇄의 관념이 내재돼 있다. 즉, 죽음이 나의 삶은 앗아가지만 나의 존재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의로움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 힘이 된다. 맹자는 말한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로움 또한 내가 원하는 바지만, 두 가지를 다 취할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겠다.”

의로움은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로 사회와 역사를 지탱해 주는 큰 힘이라고 믿었던 선비들은 죽음을 비켜가지 않을 정도로 강직한 삶을 살았다.

○ 인간의 본질

선비는 타자의 성취를 동시에 추구했다. 인간을 절해의 고도 같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는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 철학의 유명한 명제)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철학에 반대한 프랑스 철학자 라캉의 정신과 닿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타자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직접적인 자아의식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선비는 ‘만물을 부양해 주고 감싸 안아 주며 성취시켜 줌(중용)’으로써 자아의 완성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비는 금수(禽獸)와 다른 인간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여겼다. 인간이나 금수는 보편적인 생명정신을 타고났지만 금수는 그것을 자기 안에 폐쇄시켜 이기적으로밖에 살 줄 모르는 반면 인간은 그것을 개방적으로 실현해 타자를 성취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을 천부적으로 타고났다는 것이다. 군자와 소인의 차이도 생명정신의 개폐 여부에 있다.

아울러 선비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사람됨의 중요한 징표로 여겼다. 주자는 말한다. “측은지심이 내 몸 안에 충만함을 깨닫는다면 만물이 나와 일체로서 자타 간에 더는 분별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 속에서 타인을 성취시키는 데 필요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단순히 규범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가치 판단과 윤리 지향의 성향이 오랜 기간 인간의 무의식 속에 침전된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인의예지 안에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해 가졌던 선비의 진지한 사색이 부박(浮薄)한 우리를 때린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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