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욕망이 거세된 근대문명을 뒤집다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8일 03시 00분


조재현 연출 ‘에쿠우스’
무대 ★★★★ 연기 ★★★☆ 연출 ★★★

앨런 역을 두 차례나 연기한 조재현 씨가 연출을 맡은 연극열전3 개막작 ‘에쿠우스’. 말 머리를 쓰지 않은 대신 몸짱 남자 배우들로 말이 상징하는 에로스를 강화했다. 앨런(정태우)에서 다이사트(송승환)로 무게중심을 이동했지만 원작의 한계에 대한 도발적 성찰은 부족했다. 사진 제공 연극열전
앨런 역을 두 차례나 연기한 조재현 씨가 연출을 맡은 연극열전3 개막작 ‘에쿠우스’. 말 머리를 쓰지 않은 대신 몸짱 남자 배우들로 말이 상징하는 에로스를 강화했다. 앨런(정태우)에서 다이사트(송승환)로 무게중심을 이동했지만 원작의 한계에 대한 도발적 성찰은 부족했다. 사진 제공 연극열전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서구 지식인들이 눈을 찡긋하며 이런 말을 나눌 때가 있다. 그것은 문명의 세례를 받은 교양인의 표식을 서로 확인할 때 하는 말이다. 한 가지 뉘앙스가 더해질 때도 있다. 기독교의 일신론적 진리관에 맞서 만신론(萬神論)적 진리관을 공유한다는 의미다.

연극 ‘에쿠우스’의 파격성은 바로 이 ‘그리스적인 것’에 대한 뒤집기에 있다. 열일곱 살 순진무구한 소년 앨런(정태우)이 일곱 마리 말의 눈을 찌른 엽기적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 묘미를 놓치기 쉽다.

그런 맥락에서 연극의 주인공은 앨런이 아니라 그의 치료를 맡은 정신과의사 다이사트 박사(송승환)다. 앨런의 일거수일투족이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적인 것에 심취한 그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는 극작가 피터 섀퍼의 분신이다. 섀퍼가 그리스적인 것에 심취해 있다는 것은 ‘고곤의 선물’에서 그가 타락한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핏빛 제의극을 펼치던 그리스 비극정신으로 회귀하기를 요구한 데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문제는 그의 ‘그리스적인 것’이 서양문명의 양대 기둥으로서 헤브라이즘뿐 아니라 헬레니즘마저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를 인격화해서 설명하면 섀퍼는 서양문명의 양대 젖줄로서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모두 부정하는 토대 위에 ‘그리스적인 것’을 재구축한다. 그것은 세계의 정화를 위해 사람의 목숨을 바치기도 하고, 신과 인간의 합일 또는 동물과 인간의 일치에서 충만감을 만끽하고, 죄의식 없는 쾌락을 위해 동성애도 마다않는 것이다. 그것은 근대교육에 의해 주입되지 않은 원시적 삶의 충동이다. 푸코 식으로 말하면 정상과 비정상의 잣대에 의해 광기란 딱지표가 붙은 채 근대적 삶에서 추방된 것이다.

앨런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이양숙)와 무신론적 도덕론자인 아버지(김상규)에게서 이중으로 소외된 아이로 설정된다. 정상적 교육을 받지 못하면서 이성적 문명(로고스)에서 배제된 앨런은 신화적 의식(뮈토스)의 지배를 받는 인간, 일종의 ‘늑대인간’으로 자라난다. 근대적 시각에서 늑대인간은 시대착오적 존재일 뿐 아니라 근대적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흉기다. 하지만 다이사트 박사의 눈엔 그것이 일종의 기적이다.

극 막판 다이사트는 관객을 향해 묻는다. 과연 앨런을 정상인으로 돌려놓아 자신과 같은 유령으로 만드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이는 현대 문명인들에게 진한 울림을 주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이사트 역시 틀렸다. 그가 유령인 만큼 앨런 역시 유령이기 때문이다. 라캉의 말을 빌리면 다이사트가 ‘바르게 살자’라고 말하는 대타자(大他者)에 포박된 유령이라면 앨런은 ‘인생을 즐겨’라고 말하는 초자아(超自我)의 주술에 묶인 유령이다.

이는 다이사트와 앨런 모두 진정한 성관계가 불가능한 ‘거세된 존재’라는 공통점에서 확인된다. 다이사트가 앨런이 지닌 열정의 부족으로 아내와 6년간 섹스 없는 삶을 살았다면 앨런 역시 바로 그 열정 때문에 여자친구 질(김보정)과 섹스에 실패한다. 180cm 이상의 근육질 남자배우들의 몸으로 형상화한 말의 이미지는 “성관계는 없다”고 한 라캉의 명제를 더욱 공허하게 들려줄 뿐이다.

칸트 이후 서양지식인에게 근본적 문제는 야생과 문명, 자연과 문화 사이에 놓인 간극이다. 제국주의적 근대가 이성의 이름으로 후자의 손을 들어줬다면 탈제국주의적 탈근대는 그 반작용으로서 전자의 손을 들어줬다. 서양 로고스의 출발점인 그리스를 야생적 삶으로 재구성하려는 다이사트의 욕망은 그 징후다. 하지만 앨런의 예에서 보듯 그 역시 근원적 한계에 봉착했다. 앨런뿐 아니라 다이사트에게도 필요한 것은 환상에서 빠져나와 여전히 정체불명인 그 간극을 직시하는 것이다.

내년 1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문화공간 이다 1관. 02-766-6007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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