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 씨는 금년 여름 헝가리 부다페스트 방송국에서 자작의 ‘심포니크 판타지 코레아(조선환상교향곡)’를
‘컨덕(conduct)’하여 구주 전국에 중계방송하엿는데…안 씨가 특히 서구음악가 사이에 높이 평가되는 것은 조선독특의 멜로디를
살려 서구인이 잘 표현할 수 없던 동양적인 정서를 예술적으로 완성해낸 점이다.” ―동아일보 1938년 12월 11일자》
일제강점기 세계를 돌며 지휘 활동을 했던 안익태(1906∼1965)에게 ‘한국환상곡’은 단지 개인적 환상의 표현만은 아니었다. 일생 동안 그가 가슴에 품어왔던 조국애를 총집결한 작품이었다. 그는 1938년 2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이 곡을 초연한 이래 유럽 미국 남미 등 세계 각국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마다 ‘한국환상곡’을 공연했다.
평양에서 숭실중학교를 다닌 안익태는 1919년 3·1운동 관련 수감자 구출운동에 가담했다가 퇴교처분을 받은 뒤 일본 도쿄국립음악학교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193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한인교회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에서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감명 깊은 경험을 한다. 동포들이 태극기를 걸어놓고 ‘올드 랭 사인’ 곡조의 애국가를 목 놓아 부르는 모습이었다.
신시내티와 필라델피아에서 첼리스트로 명성을 날린 그는 193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거장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에게 지휘를 배웠다. 이후 헝가리 부다페스트,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체코 프라하, 아일랜드 더블린, 독일 베를린 등 각지에서 지휘요청이 쇄도하자 유럽에 정착하게 된다. 1947년부터 10년간 안익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교류하며 세계적인 악단의 지휘자로 높은 명성을 쌓았다.
1939년 1월 3일자 동아일보 ‘약동하는 조선 멜로디! 자작한 조선환상교향곡을 구미각지에서 연주 방송, 첼리스트·컨덕터 안익태 씨의 신기’ 기사는 암울했던 일제 말기 조선인의 자부심을 세계에 알린 그의 활약상을 대대적으로 전했다. 기사는 “이 ‘조선환상교향곡’은 조선의 방대한 역사를 주제로 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안익태에게 음악이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1936년 신한민보 인터뷰에서 “신작 애국가가 우리 민족운동과 애국정신을 도우는 데 다대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1934년 4월 18일 동아일보에 그가 직접 쓴 기고문에서도 그는 “조선청년은 타국인과 판이한 입장에 있는 것과 동포에게 중대한 의무가 있다”며 “개인으로 유의미한 생애를 지내고 아울러 동포에게 유효한 봉사를 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안익태는 광복 후 1955년 3월 18일 25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그를 보러 온 5만 명의 관중은 안익태의 지휘로 ‘애국가’를 목청껏 불렀다.
오늘날 지휘자 정명훈 씨,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장영주 씨, 첼리스트 장한나 씨, 소프라노 조수미 씨를 비롯한 세계 정상급 음악인들이 세계를 누비며 한국인의 예술성을 세계인에게 전하고 있다. 한국에서만 교육받은 음악가가 세계적 권위의 콩쿠르에서 정상을 차지하는 일도 이제는 놀랍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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