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책]가난을 업고 떠났던 서울길…박완서의 ‘내가 어렸을 적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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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2일 03시 00분


◇ 나 어릴 적에/박완서 지음·김재홍 그림/112쪽·9800원·처음주니어

나는 스케이트를 타다 할아버지께 크게 야단을 맞았다. 할아버지의 눈에는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이 무당의 작두춤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림 제공 처음주니어
나는 스케이트를 타다 할아버지께 크게 야단을 맞았다. 할아버지의 눈에는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이 무당의 작두춤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림 제공 처음주니어
저자는 머리말에서 “내 유년기 이야기니까 아마 옛날이야기가 될 것”이라며 “그때는 세상이 온통 남루하고 부족한 것 천지였지만 나름대로 행복했노라고 으스대고 싶어서 썼다”고 말한다.

여덟 살이 되던 해 봄, 서울에서 살던 엄마가 경기도 개풍군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던 나를 데리러 왔다. 집안의 기둥인 오빠의 교육을 위해 할아버지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골집을 떠났던 엄마가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된 나를 데리러 왔던 것이다.

서울로 가는 날, 마을에서 개성역까지 이십 리 길은 사람들 발길에 다져진 매끄럽고 새하얀 눈길이어서 나는 자꾸 미끄러졌다. 지게에 서울 갈 짐을 싣고 앞서가던 호뱅이(우리 집 머슴)가 보다 못해 새끼를 한 발쯤 얻어와 내 털신에 칭칭 동여매 주었다.

서울에 도착해 보니 엄마의 살림은 형편없이 궁색했다. 꼬불꼬불한 돌계단 길을 한없이 기어 올라가면 나오는 깎아지른 듯한 축대 끝에 제비집처럼 매달린 초가집의 문간방이 엄마의 거처였다. 나는 못 알아들을 창밖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이불 속에서 소리를 죽여 가며 울었다. 엄마는 “안집 애하고 싸우지 마라, 안집 애가 주전부리하는 거 바라보지 마라”는 잔소리를 했고, 감옥소 마당에서 놀다 들어온 날은 “이년, 어디 가서 못 놀아서 거기서 노느냐”며 종아리에 매질을 했다.

겨울방학에 귀향할 때 나는 스케이트를 가지고 갔다. 얼음판에서 친구들에게 솜씨를 뽐내는데 머슴이 뛰어와 나를 사랑으로 업어 들였다. 할아버지는 “어디서 덕물산(개성에 있는 무속의 본산) 무당의 작두춤을 흉내 내느냐”며 담뱃대로 내 정수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원로 소설가인 저자가 유년시절을 소재로 글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저자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성장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년)를 내기도 했다. ‘그 많던…’과 달리 이 책은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에 맞춰 할머니가 손자, 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쉽게 이야기를 풀었으며 풍성한 삽화를 더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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