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와 딸의 관계를 그린 연극 중에 이처럼 암담한 작품이 있을까.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동명의 스웨덴 영화(1978년)를 원작으로 한 ‘가을 소나타’(연출 박혜선)는 모녀관계를 통해 어머니 신드롬을 일으킨 다른 공연작품과 질적으로 다르다. 다른 공연들엔 일종의 공식이 있다. 아무리 괴팍한 모녀관계라도 한바탕 눈물을 통해 감성적 정화에 도달한다. ‘가을 소나타’는 이와 궤를 달리한다.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모녀관계를 통해 인간조건의 본질적 비극을 그려내는 것이다.
세계적 피아니스트인 샬롯(손숙)은 자아실현을 위해 가족은 늘 뒷전이었던 엄마다. 그의 맏딸 에바(추상미)는 그런 어머니를 목사인 남편 빅토르(박경근)의 시골 목사관에 초청한다. 연주회 일정에 쫓기던 샬롯이 목사관에 나타난다. 7년 만의 해후다.
오랜만에 만났건만 화려한 샬롯과 정숙한 에바는 초장부터 어긋난다. 샬롯은 오랜만에 딸을 만났지만 자기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른다. 까다로운 엄마의 기호에 따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고분고분해보이던 에바는 돌연 엄마의 급소를 찌른다. 엄마가 요양원에 버려둔 여동생 엘레나(이태린)를 2년 전 자신의 집에 데려와 돌보고 있다고.
흠칫 놀라는 샬롯. 그때부터 전세는 서서히 역전된다. 에바는 어머니로서 직무유기를 한 샬롯으로 인해 자신과 엘레나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털어놓는다. 샬롯은 “내가 고의로 그런 게 아니잖니”라며 화살을 회피하기 급급하다 결국 하룻밤 만에 도망치듯 딸의 집을 떠난다. 그런 엄마를 용서한다며 다시 초청하는 에바의 편지글로 극은 끝난다.
극의 표면만 본다면 이 작품은 모성애의 본질을 묻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극은 에바의 집을 고정된 무대로 삼음으로써 인간의 의식세계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구분하고 그들 세계의 소통불능을 인간존재의 비극으로 규명한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을 영화보다 더욱 뚜렷하게 형상화해냈다.
무대에서 1층은 일상이 이뤄지는 에바의 공간이다. 에바는 그 공간에서 끊임없이 글을 쓰거나 모녀관계를 합리적 대화로 복원하려고 애쓴다. 따라서 에바는 언어와 이성을 통해 세계를 포착하려는 상징계를 대표하는 존재다.
2층은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샬롯이 묵는 화려한 손님방과 엘레나가 기거하는 으슥한 침실이다. 샬롯은 음악과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자아상에 심취해 있기에 철저히 상상계에 살고 있는 인물이다. 세상이 온통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현실을 객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 엘레나는 언어나 상상만으론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실재계를 표상하는 존재다. 엘레나는 그들 모녀관계의 비밀 열쇠를 쥐고 있다. 하지만 신체가 서서히 퇴화하는 질병으로 말을 못하므로 기껏해야 몸짓이나 울부짖음을 통해 현실에 개입한다.
상징계에 사는 에바와 상상계에 사는 샬롯은 서로에 대한 욕망(모성에 대한 그리움)과 죄의식(자식을 버렸다는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지만 서로 건너지 못할 강 너머에 살고 있기에 근본적 화해에 이르지 못한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그 욕망과 죄책감의 덩어리가 육화한 존재가 바로 엘레나다.
병으로 걷지도 못하는 엘레나는 기어서 샬롯과 에바의 공간에 침투한다. 엘레나는 샬롯의 꿈속으로 기어들어오거나 에바가 언어의 창끝으로 샬롯의 상상의 성을 허물어뜨리려고 할 때 울부짖으며 2층 계단을 기어 내려온다. 그렇게 엘레나와 대면하는 순간 샬롯과 에바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자신들의 공간으로 숨어든다.
에바가 도망치듯 떠난 엄마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는 마지막 장면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라캉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결여를 채우기 위한 반복이야말로 상징계의 본성이라고 갈파했다. 결국 용서로 비치는 에바의 행동 역시 샬롯에겐 끔찍한 악몽의 반복일 뿐이다. 3만∼5만 원. 내년 1월 10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1544-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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