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진눈깨비처럼 흩날리는 사랑… 희망…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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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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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13월의 길목’
대본 ★★★☆ 연기 ★★★★

연극 ‘13월의 길목’에서 정희(황세원·왼쪽)와 영수(이동준)는 몸을 밀착해 탱고를 추지만 그 관계는 폐허처럼 허물어져간다. 사진 제공 극단 수
연극 ‘13월의 길목’에서 정희(황세원·왼쪽)와 영수(이동준)는 몸을 밀착해 탱고를 추지만 그 관계는 폐허처럼 허물어져간다. 사진 제공 극단 수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12월의 어느 저녁,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카페 ‘13월의 길목’은 소박한 파티 준비로 북적인다. 조명이 켜지면 관객은 이 카페의 한구석에 앉은 손님이 된다.

무대를 꿈꾸는 연극배우인 카페 주인 선재(김정은), 동사무소 직원이자 작가 지망생인 가실(손성연), 인도 여행을 갈망하는 백수 난주(이서림)가 지키고 있는 카페에 스페인 문학 번역가 인화(차유경)와 대학생 수현(유우재), 사진작가 영수(이동준)와 주부 정희(황세원), 지방 방송국 기자 동호(박윤희)가 하나둘씩 들어선다.

연극 ‘13월의 길목’에는 주인공, 사건, 클라이맥스가 없다.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사람들과 그들이 나누는 일상 대화가 있을 뿐이다. 평온해 보이는 껍질은 평범한 질문을 받고 조금씩 부스러진다. 숨겨둔 상처와 이루지 못한 꿈이 서서히 드러난다.

동거 중인 영수와 정희는 “결혼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라는 물음에 순간 멈칫한다. 서로를 사랑하리라는 허술한 믿음은 그들이 선보이는 어설픈 탱고 같다. 늘 밖으로 도는 영수를 기다리는 정희는 변화 없는 생활에 지쳐만 간다.

PD가 되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동호는 길바닥에 짓이겨진 동물의 사체에서 자신을 본다. 선재는 옛 연인 동호를 피하고 싶고, 난주는 동호를 슬픈 눈으로 본다. 인화를 바라보는 수현의 시선이 가실은 불편하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 덕분에 어느 변두리에 이런 인물들이 살아 숨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는 결말은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지루한 일상을 견디는 이들은 마찰 없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어느 관계도 확실하지 않다. 엇갈린 시선, 지나간 사랑과 바라보기만 하는 사랑, 입에서만 맴도는 희망…. 메마른 겨울 같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2만 원. 2010년 1월 3일까지 서울 대학로 행복한극장. 02-889-3561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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