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술의 기본은 좋은 물. 좋은 물은 바위틈에서 나와야 하고 사철 온도가 일정해야 하며 무거워야 한다. 수많은 고승과 도인을 배출한 호남의 명산 모악산(794m). 이 산 정상 아래 자리한 수왕사(水王寺)는 ‘물왕이 절’로도 불린다. 수왕(水王)이니 물의 왕이다. 물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이 절 주지에게 대물림으로 내려오던 술이 송화 백일주다. 스님이 술을 빚어 판다고? 절에서 술을 곡차라 부른다. 절마다 술이 있었다.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큰 절에는 그 절의 독특한 행사용 법주가 있었다. 곡차는 선승들에게 필요한 기(氣)음식이다. 얼음장 같은 산중 냉골마루나 바위에 앉아 수행을 하다 보면 몸에 병이 찾아든다. 고산병 위장병 냉병 영양결핍 등 직업병을 막고 치료하기 위해 곡차를 한 모금씩 마셔왔다. 술은 절에서 금기이지만 한편으로 수행의 방편이 되기도 했다. 경지에 이른 선사들에게 곡차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진정한 차였다.》
수왕사에서는 송화 백일주를 진묵대사(1562∼1633) 기일(음력 10월28일)에 제상에 올린다. 수왕사에는 진묵대사를 모시는 조사전이 있다. 정유재란 때 불탄 수왕사를 중창한 진묵대사(1562∼1633)는 ‘작은 석가’라 불릴 만큼 경계를 넘는 도승이었고 술을 좋아했다. 호남에는 그의 기행과 이적에 관한 수많은 설화가 남아있다. 배고파 구걸하러 온 모녀에게 금부처의 팔뚝을 떼어 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잡은 물고기를 살려 보내기도 했다고 전해온다.
“하늘은 이불로, 땅은 깔개로, 산을 베개로 누워 보니.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인데, 바다는 술통처럼 넘치는구나. 맘껏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이네.”
김삿갓도 탄복했다는 호방한 시를 남긴 진묵대사가 수왕사에서 빚어 먹고 그 비법이 전해 오는 술이 송화 백일주다. 전북 완주군 구이면 수왕사 주지 벽암 스님(속명 조영귀·60)은 1994년 송화 백일주 양조법으로 대한민국 전통식품 명인1호에 지정됐다. 열두 살에 출가해 열일곱 살부터 수왕사에 머물면서 술을 담가 온 지 30년 만이다. 1998년 민속주품평회 대통령상을 받았다. 2007년에는 대통령의 설 명절 선물로 선정됐다.
송화 백일주는 밀로 만든 누룩에 오곡과 솔잎 댓잎을 넣어 발효시켜 16도의 발효주를 만들고 이 술을 증류해 소주를 내린다. 16도 발효주는 송죽 오곡주라는 이름으로 팔린다. 여기에 송홧가루와 산수유 오미자 구기자가 넣고 100일 동안 저온 숙성한다. 도수는 38도로 솔향이 강하다. 술은 투명한 노란빛. 첫맛은 쌉쌀하고 뒷맛은 달콤하다. 빨리 취하고 빨리 깬다. 몸이 가벼운 술이다. 스님은 “소나무 성분이 물에 잘 용해되지 않고 휘발성이 강해 알코올이 빨리 빠져나가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옛날 어머니들은 5월이면 고추장과 된장을 담은 장독 뚜껑을 열어 놓고 송홧가루가 장에 내려앉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송홧가루가 방부제 역할을 해 우리 몸에 좋은 효모와 효소가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송화 백일주에 들어가는 송홧가루도 같은 역할을 해서 술을 오래 두고 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송화백일주는 3년을 숙성했을 때 맛과 향에서 가장 원숙한 상태가 된다. 스님은 1992년 절에서 멀지 않은 모악산 아래 완주군 구이면 계곡리에 아예 술도가(송화양조)를 차렸다. 돈보다 송화주의 맥을 잇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다. 그가 빚는 것은 술이 아니라 전통이요 약인 셈이다. 이곳에서는 소줏고리나 재래식 술독 대신 스테인리스로 만든 발효통을 사용한다. 옛날에는 술에 소나무의 기운을 담기 위해 소나무 큰 뿌리 밑에 술독을 묻었다.
“좋은 송홧가루와 솔잎 채취가 중요해요. 산꼭대기 소나무에서 한 번 수분이 빠진 늦가을 솔잎을 따고 잘 마른 송홧가루는 수분이 들어가지 않도록 특별히 밀봉 보관해야 합니다”
송화 백일주에는 과일이나 횟감이 안주로 제격이다. 독주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오리 등 육류와도 함께 즐긴다. 송화 백일주의 명맥은 등단 시인인 후계자 조의주 씨(36)가 잇고 있다. 스님의 속가 아들인 그는 “힘이 들지만 수백 년 내려오는 술을 후손에게 전수하는 보람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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