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예외 없다. 여행 마치고 집에 돌아와 신발 벗으며 하는 말. ‘내 집이 최고야.’ 그럴 걸 왜 떠나. 반문도 하지만 그 역시 누구도 대답하지 못한다. 그게 여행의 마력이다. 여행이란 영어단어 트래블(Travel)은 ‘고생이 많다’는 트라베일(Travail)에서 왔다. 그런데 트라베일의 어원이 재미있다. 로마시대 사용했던 무시무시한 고문기구 ‘트리팔리움(Tripalium)’이란다. 사람을 땡볕 아래 꼼짝 못하도록 묶어두기 위해 땅에 박은 세 개의 막대기다. ‘여행’과 ‘고생’은 같은 단어다.
지난 15년간 전 세계를 여행하며 수많은 여행을 취재해온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다. 편한 여행이 있었느냐고. 없다. 여행은 언제나 즐거움과 고생스러움을 동시에 준다. 편하고 싶다고? 그러면 여행은 포기하라. 이 세상 어디고 편하고 즐겁기만 한 여행은 없으니까.
그런데 최근 유일한 ‘예외’를 발견했다. 피로를 느끼지 못한 아주 특별한 여행이었는데 다름 아닌 ‘레일크루즈 해랑’투어였다. ‘레일크루즈(Rail Cruise)’란 배 대신 열차를 이용한 크루즈여행이다. 코레일(철도공사)과 코레일투어서비스(철도전문여행사)가 ‘해랑’이란 객실과 카페 등 호텔설비를 갖춘 특별열차로 운영 중인 최고급 열차유람이다. 지난주 일본관광객 27명을 태우고 한반도를 일주한 2박 3일 레일크루즈를 따라가 보았다.》
오후 2시 서울역 6번홈. 온통 군청색으로 칠한 낯선 열차가 서있다. 레일크루즈 열차 ‘해랑’이다. 이 색깔. 내년 월드컵을 개최하는 남아공에서 탔던 블루 트레인(Blue Train)을 연상시킨다. 프리토리아∼케이프타운을 운행(1박 2일 25시간)하는 세계 최고급 관광열차다. 열차 외벽에 그려진 커다란 심벌 마크. ‘봉황’이다. 봉황은 대통령 휘장에 등장하는 군왕의 이미지. 이 열차가 고급임은 그 심벌만 봐도 단박에 알 수 있다.
○ 휴식하는 열차, 해랑
레일크루즈는 모두 8량. 객실 칸인 3호차에 올라 통로문을 열었다. 차창을 낀 좁은 통로가 나를 맞는다. 반대편 벽은 모두 객실. 객실로 들어서자 통유리 차창의 실내가 앙증맞다. 2층 침대(밑은 더블, 위는 싱글베드)와 26인치(66.04cm) 벽걸이형 TV모니터, 인터폰이 전부다. 샤워 겸용 화장실도 딸려 있다.
2시 30분. 2박 3일간 전국을 누빌 레일크루즈 해랑이 출발했다. 철도루트는 목포∼벌교∼해운대∼경주∼안동∼단양∼서울. 전라 경상 충청 세 지방을 들르는 한반도 남쪽 일주 코스다. 오늘 목적지는 목포. 이제부터 다섯 시간은 이 해랑에서 보내야 한다.
하지만 객실에 갇힐 이유는 없다. 해랑은 레일 크루즈다. 크루즈 십처럼 휴게공간을, 그것도 여덟 량 중 두 량이나 갖췄다. 그러니 거기서 지내면 된다. 4호와 5호차의 카페 ‘선라이즈’와 이벤트 룸 ‘포시즌’이 그것.
해랑에서 2박 3일을 지내보니 카페 선라이즈는 레일크루즈 해랑의 사랑방이었다. 승객은 열차 이동 중 대부분 시간을 이곳 선라이즈에서 보낸다. 카페 실내는 이렇다. 중앙의 갤리(부엌)를 중심으로 4인용과 2인용 테이블이 양 창가에 놓여 있다. 갤리 서비스는 유니폼 여승무원 몫. 그 수준은 항공기의 준비즈니스클래스급이다. 스낵과 음료, 주류가 제한 없이 제공된다. 맥주 와인은 물론이고 막걸리까지. 수시로 신선한 과일과 치즈케이크, 크루아상과 치즈 오징어 등 마른안주도 낸다. 커피와 과일주스는 물론이고.
오후 3시. 부드러운 햇살이 맑은 겨울하늘에서 카페 선라이즈 실내로 쏟아져 들어온다. 한가로운 오후의 기차 간. 차창 밖으로는 수시로 풍경이 바뀌고 실내는 편안한 음악으로 가득하다. 차창 가에 자리를 잡고 와인을 홀짝인다. 소비뇽블랑(백포도주)의 상큼 발랄 깔끔한 맛이 오늘따라 돋보인다. 넓은 차창의 밝은 채광과 모처럼의 여유 덕분이리라.
○ 기차로 크루즈여행을
크루즈의 강점이라면 여행지마다 짐 쌀 필요가 없는 편안함이다. 레일크루즈 역시 같다. 짐은 기차에 두고 몸만 움직인다. 잠자고 휴식하다 보면 레일크루즈가 나를 새로운 여행지로 데려다 준다. 그러니 이보다 편안한 여행이 있을까.
이날 해랑의 탑승객은 일본인 단체관광객 27명. 그들의 2박 3일 레일크루즈 일정은 기막혔다. 전라 경상 충청 세 지방의 상징적인 관광지를 두루 둘러보는 코스다. 첫날은 목포에서 유달산 야간관광 후 삼합이 곁들여진 남도한정식 상을 받는다. 이튿날엔 영암에서 연포탕으로 아침식사를 한 뒤 왕인박사 유적지와 보성 녹차밭, 순천의 낙안읍성 민속마을을 차례로 들른다. 점심은 벌교에서 꼬막정식으로 한다. 그동안 해랑은 목포에서 벌교역으로 이동한다. 식후 해랑을 타고 부산으로 향한다. 영호남을 잇는 이 경전선 열차여행의 끝은 해운대. 동백섬을 산책하는 동안 광안대교와 해운대의 야경을 감상하고 근처에서 생선회정식으로 저녁식사를 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부근 새로 개발한 센텀시티에서 고급 스파를 즐긴 후 열차로 돌아간다.
이튿날 오후 11시. 해운대역을 출발하자 해랑의 이벤트룸에서는 가라오케 파티가 펼쳐졌다. 승무원은 와인과 맥주, 막걸리로 술상을 보았고 일본인 관광객들은 대형모니터의 영상을 보며 가라오케를 즐겼다. 그리고 이들이 잠든 새 해랑은 경주로 이동했다. 사흗날 아침. 경주 현대호텔에서 전복죽으로 아침식사를 한 뒤에는 이른 아침이라 아무도 없는 불국사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안동에 가 하회마을을 산책한 뒤 헛제사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 일정은 버스로 백두대간의 소백산맥을 넘어 단양 남한강변의 도담삼봉과 드라마 태왕사신기 촬영장을 관광하는 것. 그동안 해랑은 단양역으로 이동, 오후 4시 반 일정을 마친 여행객을 태우고 서울역을 향해 출발했다.
여행전문기자인 내게도 이 코스는 환상적이었다. 사흘 만에 반도 남쪽을 두루 섭렵한다는 것이 통상의 교통수단으로는 어려운 일이어서다. 부지런히 차를 몰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이렇듯 여유롭게 여행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 오직 레일크루즈 해랑 만 줄 수 있는 특별한 서비스다. 그래서 레일크루즈 해랑은 대한민국의 대표상품이 될 만한 가치가 있다.
○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여행
해랑의 일본여행객은 모두 노년층이었다. 60대는 청춘이고 대개는 70대였다. 게중엔 80대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여행 내내 피곤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중간기착지에서 연계 버스관광을 마다한 경우가 없었으니까. 그 이유. 간단하다. 실제로 피로감을 느끼지 않아서다.
나는 그 이유를 ‘크루즈’스타일의 ‘휴식’에서 찾았다. 일정은 녹록지 않다. 둘째와 셋째 날 모두 기상시간은 오전 5시 반. 그리고 투어는 6시 반부터 시작됐다. 하루 일정도 짧지 않다. 족히 예닐곱 시간은 된다. 그런데도 피로감을 주지 않는 이유. 그것은 열차이동 중에 충분한 휴식을 즐길 수 있어서다.
오후 네 시간의 이동 중 휴식은 달콤하기만 하다.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승객은 카페 선라이즈부터 찾는다. 애프터눈 티를 즐기기 위해서다. 승무원들은 커피와 차, 치즈케이크과 비스킷, 과일을 서비스한다. 그러면 테이블에 마주앉아 담소하며 오후의 휴식을 느긋하게 만끽한다. 그 다음에는 객실에서의 오수. 그러다 보면 새로운 목적지에 도착하고 거기서 가벼운 산책으로 관광한 다음 저녁식사를 즐긴다. 그리고 나서는 스파에서 목욕과 휴식을 즐긴다. 피곤할 이유가 없다.
친절한 네 명 승무원(여성 3명, 남성 1명)의 따뜻한 서비스도 또 다른 이유다. 마술쇼도 펼치고 플루트 연주도 들려주며 가라오케 이벤트도 펼친다. 사흘을 함께 지내다보니 가족처럼 편안하게 다가온다. 어떤 불편도 느낄 수 없었던 완벽한 여행과 휴식 공간 해랑. 이것이 레일크루즈 해랑의 장점이자 특징이었다. 가격이 높다는 게 좀 부담스럽지만….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 “일본 관광객 많아… 명품투어 만들 것” ▼
“지난해 11월 운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찾는 분이 거의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꽤 늘어난 편입니다.”
승무원 류승희씨(29·여) 말이다. 가격이 높은 만큼 승객은 대부분 중상류층. “부부와 가족이 많아요. 최근엔 미국 일본의 젊은층 교포도 옵니다. 모국을 찾은 김에 계획한 가족여행이나 신혼여행으로 해랑을 선택한 경우지요.”
이번에 탄 일본단체관광객(27명) 중에도 교포가 세 쌍이나 됐다. 일본여행사가 판매 중인 레일크루즈 해랑이 포함된 여행상품(서울 1박 포함한 3박 4일 일정)의 현지 가는 15만8000엔(201만 원가량). “다른 상품에 비해 좀 높은 편이지요. 하지만 타본 뒤에는 대부분 수긍하세요. 그만한 가치를 인정하시는 거지요.”
레일크루즈 해랑은 아직 손 볼 점이 많다. 객실난방이며 잠자리며…. 그럼에도 탑승객 만족도는 높다. 그 이유. 기자의 눈에는 승무원의 정성담긴 서비스 덕으로 비쳤다. “레일크루즈는 24시간 근무체제입니다. 그리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여행객이 일정을 마치실 때까지 매일요. 그러다 보니 노동 강도가 KTX승무원에 비해 세 배쯤 되는 것 같아요.” 모든 승무원의 공통된 견해인데 이들은 모두 KTX승무원 출신이다.
그래도 이들은 첫 레일크루즈 해랑의 승무원이라는 자부심으로 버틴다. 남성 승무원 김정훈 씨는 마술까지 배워 공연을 펼치고 여성 승무원 최종화 씨는 플루트연주를 들려준다. 막내 승무원 조수민 씨는 가야금을 배워 들려줄 계획이다.
이들 모두에겐 꿈이 하나 있다. 레일크루즈의 최고봉이라는 블루 트레인을 타보는 것. “최고가 되기 위해 꼭 한 번 타보고 싶어요. 그런데 여건이 허락지 않네요. 비용도 들고 시간도 없고….” 승무원들은 하루 빨리 그런 기회가 와서 레일크루즈 해랑을 세계적인 명품 여행특급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힘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여행정보|
◇레일크루즈 해랑 ▽작명=‘해랑’은 ‘해와 함께 금수강산 유람’의 줄임말. ▽구성=1호, 2호가 있다. 1호(32실 72명 정원)는 정기노선, 2호(23실 54명 정원)는 특별노선 운행. ▽정기노선 △1호=2박 3일, 1박 2일 등 3개 일정. 출발 도착 서울역 ①2박 3일=섬진강기차마을∼순천(국악공연)∼해운대(동백섬)∼경주(유적투어)∼정동진역(해맞이)∼동해역(온천욕)∼추전역. 화요일 오전 10시 반 출발 ②1박 2일=경주∼정동진∼망상∼태백 또는 익산(미륵사지)∼목포∼순천(순천만 갈대밭, 선암사). 토요일 오전 9시 15분 출발 △2호=전세형의 특별이벤트에 활용. ▽가격(객실당)=일정, 객실별. △2박 3일=디럭스룸 195만 원, 스위트룸 232만 원(이상 2인). 패밀리룸 239만 원(3인). △1박 2일=디럭스룸 128만 원, 스위트룸 154만 원(이상 2인), 패밀리룸 155만 원(3인). ▽예약 및 문의=코레일투어서비스 △전화=1544-7755 △홈페이지=www.korailtou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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