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극 ‘바람의 정거장’(연출 김아라)이 공연된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는 모래벌판으로 변했다. 무대 위엔 모래 5t을 부었다. 무대 장치의 일부인 하수도관을 1층 객석까지 길게 연결했다. 관객은 기존 객석 대신 무대 위 세 면에 설치한 자리에서 배우의 움직임을 근접 관찰할 수 있다.
하수도관, 녹슨 구형 냉장고와 재봉틀, 양동이가 모래벌판 여기저기에 처박혀 있다. 남자 9명과 여자 9명이 짐 보따리와 여행가방을 들고 이곳을 헤맨다. 모래벌판에선 발이 푹푹 빠지고, 하수도관 위를 걷는 일은 위태롭다.
일반적인 연극이 소설이라면 ‘바람의 정거장’은 시에 가깝다. 배우들은 아무 말이 없다. 표정과 몸짓뿐. 등장인물의 이름도 없다. 움직임을 기술한 지문에도 ‘여자a’ ‘남자a’ 식으로 표시돼 있다. 침묵극이라니…. 대사로 상황과 감정을 설명할 수 없다면 답답하거나 지루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이 연극은 오히려 말이 얼마나 관객을 틀 속에 가두는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모든 장면은 관객 앞에 활짝 열려 있다. 천천히 떨어지는 물방울을 연상시키는 로저 이노의 피아노곡 ‘리콜링 윈터’도 극에 잘 스며들었다.
욕망의 시선은 엇갈리고, 황량한 벌판에선 만남과 이별이 반복된다. 다른 여자를 응시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아내, 한 남자를 바라보는 두 여자, 한 여자에게 다가가는 두 남자, 무리에 속하고 싶은 여자와 그를 거부하는 사람들…. 등장인물들은 이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주변을 맴돌며 행동을 따라한다. 때론 몸을 기대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기도 하지만 관계 속에 있어도 결국은 혼자다.
아쉬움이라면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였다는 것. 관객에게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실험극인 만큼 한층 상징적인 표현 방식을 숙고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래벌판은 어항 속으로 탈바꿈한다. 영상으로 투사된 주황색 금붕어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유영하는 가운데 무거운 짐을 이고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노부부가 먼 곳을 향해 힘겹게 발을 떼며 걸어간다. 천천히 걷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인물들을 통해 전해지는 건 인간의 절대고독이다. 공연이 끝난 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 세상이 한없이 외로운 공간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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