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중궁궐 속 소설들 ‘세상 밖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25일 03시 00분


한국학중앙연구원, 창덕궁 낙선재 보관본 현대어로 옮겨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조선 왕실에서 읽었던 옛 한글소설 ‘낙성비룡’ ‘문장풍류삼대록’ ‘징세비태록’(위부터) 등 3종을 현대어로 최근 냈다. 이 연구원은 83종의 옛 소설을 앞으로 10년에 걸쳐 출간할 계획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조선 왕실에서 읽었던 옛 한글소설 ‘낙성비룡’ ‘문장풍류삼대록’ ‘징세비태록’(위부터) 등 3종을 현대어로 최근 냈다. 이 연구원은 83종의 옛 소설을 앞으로 10년에 걸쳐 출간할 계획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낙성비룡’ 등 3종 첫 출간
조선 상류층 독서취향 가늠

83종 2000여 책 방대한 규모
해양 판타지 등 주제도 다양

조선 왕실에서 널리 읽었던 옛 한글소설이 현대어로 나온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창덕궁 낙선재에 보관돼 있던 이 소설을 ‘조선 왕실의 소설’ 시리즈로 출간키로 하고 그 첫 결실로 ‘낙성비룡(洛城飛龍)’ ‘문장풍류삼대록(文章風流三代錄)’ ‘징세비태록(懲世否泰錄)’ 등 3종을 한데 묶은 소설집을 최근 냈다. 이 소설들은 궁중의 여인들이 읽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민간에서 읽혔던 홍길동전이나 춘향전에 비해 이야기의 규모가 크고 전개도 더 흥미롭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영웅 전쟁 사랑 등 소재가 다양

‘낙선재본 소설’은 모두 83종, 2000여 책으로 구성돼 있다. 남녀 간의 사랑, 가정사, 영웅의 일대기, 전쟁 등 주제가 다양하다. 이 가운데 47종이 창작 소설이고 35종은 중국 소설을 번역한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번역인지 창작인지 구분이 안 된다. 이 소설들은 대부분 1600∼1800년대에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설의 특징은 단편이 거의 없고 대부분 장편이라는 점이다. 창작 소설인 ‘명주보월빙’은 100책이고 ‘윤하정삼문취록’은 105책으로 구성됐다. 이 두 작품은 이야기가 이어져 있는 연작이기도 하다.
낙선재 보관 소설 ‘낙성비룡’ 영인본 본문(왼쪽)과 현대어로 번역한 소설집. 사진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낙선재 보관 소설 ‘낙성비룡’ 영인본 본문(왼쪽)과 현대어로 번역한 소설집. 사진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번에 나온 낙성비룡은 ‘중국 낙양에서 용이 날았다’는 뜻으로 주인공 이경모가 ‘진짜 공부’를 통해 성공하는 이야기다. 똥을 뒤집어쓰고도 화를 낼 줄 모를 정도로 참을성 많은 주인공이 과거시험만을 위한 실리 위주의 공부가 아니라 7년 동안 절에서 온갖 책을 읽고 3년간 세상을 돌며 글을 지으면서 진정한 삶의 진리를 깨닫는 내용이다. 고위직에 오른 뒤에도 거만하지 않고 겸손함을 잃지 않아 실리만 좇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문장풍류삼대록은 ‘문장이 뛰어난 집안의 삼대에 걸친 이야기’라는 뜻으로 중국 송대의 문장가인 소동파 집안을 배경으로 삼은 이야기다. 배우자를 구할 때도 남녀를 불문하고 문장실력을 시험하는 얘기며 두 여성이 의기투합해 소동파의 조카와 결혼하는 줄거리가 재미를 더한다.

징세비태록은 ‘세상이 태평할 때 나쁜 일을 꿈꾸는 것을 징계한다’는 뜻이다. 왕실 소설 중 유일하게 청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충신과 간신 간의 대립과 전쟁, 사랑을 속도감 있게 그린 작품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 사이에서 일기 시작한 ‘청나라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식이 반영된 소설로 보인다. 특히 소설에는 청대에 명나라로의 복귀를 꿈꾸며 반란을 일으켰던 실존 인물 임상문 장군이 나오는데 전쟁 중 검무를 하는 여성에게 죽는 것으로 그려진다.

○ 해양 판타지 모험 소설류도

이번 출간 작업을 주도한 임치균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학부 교수는 “민간이 읽었던 홍길동전이나 춘향전처럼 ‘전’으로 끝나는 소설과 달리 왕실에서는 이념 지향적이고 가문 의식이 뚜렷한 ‘록’자류 소설을 읽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왕실 소설 중 내년에 발간할 예정인 ‘태원지(太原誌)’를 눈에 띄는 작품으로 꼽았다. 주인공인 임성이 태원이라는 이상향을 찾아 대양과 섬을 오가며 요괴 여우를 물리치는 모험 이야기다. 임 교수는 “요즘 판타지 소설에도 뒤지지 않는 일종의 해양 판타지”라고 소개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바보인 주인공이 고난을 이겨내고 영웅이 된다는 ‘영이록(靈“錄)’, 고아인 주인공이 주변의 방해와 고난을 이겨내고 전쟁에서 승리해 영웅이 된다는 ‘낙천등운(落泉登雲)’도 내년에 발간키로 했다. 그 다음해에는 화씨 집안 처첩의 갈등과 비극을 다룬 가정소설 ‘화문록(花門錄)’도 낼 예정이다.

임 교수는 “왕실 소설은 가정과 가문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갈등, 다양한 남녀의 혼사, 지상과 천상의 교류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말하고 “감정표현이나 행위묘사가 섬세한 방대한 서사의 세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어판 발간에는 이지영 아주대 강사, 이래호 전북대 연구교수, 배영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이 참여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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