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식이 열리는 데마다 찾아가 아무나 부여잡고 울고 또 울었다. 어느 날 어느 거리였던가. 내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주변에는 기세등등한 성조기가 하늘을 뒤덮으며 나부꼈고, 미국 국가가 고막을 찢을 듯이 크게 울러 퍼졌다.”(‘앵초’)
미국에 이민 왔지만 9·11테러로 남편을 잃은 주인공 하윤. 외국인이기 때문에 희생자 추모나 시신 수습조차 여의치 않다. 그는 “죽음마저 국경이 갈리고 이해관계에 따라 귀천이 나뉘는” 이 나라의 현실에 절망한다. 하지만 그보다 당면한 문제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친분이 있는 미용실에서 청소, 잡무 등을 닥치는 대로 하며 겨우 영주권을 얻어냈지만 남편을 닮은 모습으로 자라있는 아들은 어느새 미국적인 가치에 완전히 길들어 있다.
첫 소설집 ‘코끼리’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소설화했던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는 이처럼 미국을 배경으로 이민자와 이방인 소외 문제를 좀 더 확장시켰다. 뉴욕 맨해튼 등의 공간적 배경은 첨단 자본주의의 도시 이면에 서린 불균등과 소외 문제를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불행한 가족사를 간직한 채 외롭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한국 이민자들의 삶을 그려낸 ‘롱아일랜드의 꽃게잡이’, 다국적 건설 기업에서 일하며 승승장구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가족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이국을 전전해야 하는 혼란스러움에 휩싸인 남자를 다룬 표제작 ‘폭식’ 등이 그렇다.
‘꽃가마배’는 다른 작품들처럼 이방인에 대한 타자화, 배제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배경이 한국이다. 한국으로 시집와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 태국인 계모에 대한 이야기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와 결혼한 그녀는 아버지가 죽은 뒤 집을 떠났다 화재로 죽고 만다. 그 불행한 죽음에서 가족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고국을 떠나 낯선 땅, 낯선 문화 속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보고 느낀 것들, 어려울 때 만나 정을 주고 아픔을 나눈 한인들의 이야기가 많다”며 “아낌없이 마음을 나누고 기꺼이 자신들 삶의 이력을 들려준 사람들이 새삼 보고 싶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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