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백수광부의 연극 ‘고래’(이해성 작, 박근형 연출)는 자맥질에 능하다. 처음 자맥질에선 “남파간첩도 역시 인간이다”라는 휴먼코미디를 보여주다가 두 번째 자맥질에는 남한사회의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는가 싶더니 세 번째엔 이념에 질식당한 북한 현실을 비판한다. 네 번째엔 임무 수행을 위해 동료를 가차 없이 희생시키는 섬뜩한 ‘전쟁기계’를 보여주다 다섯 번째엔 그를 뒤집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존본능을 그려낸다. 그리고 마지막엔 죽음의 공포 앞에 벌거벗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극의 뼈대는 1998년 작전 수행을 마친 남파공작원을 태우고 북으로 돌아가다 꽁치잡이 어선의 그물에 걸려 대원 전원이 자살한 북한 잠수정의 실화에서 가져왔다. 깊은 바닷속 외부와 단절된 밀폐된 공간을 무대로 4명의 잠수정 대원과 3명의 공작원이 나눈 극중 대화나 사건은 상상의 산물이다.
조명이 꺼졌다 켜지고, 고래의 처량한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이야기는 앞에서 언급한 자맥질을 거듭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위기상황이 고조됨에 따라 자맥질은 점차 깊어진다. 이와 함께 이념이니 사상이니 혁명이니 하는 관념은 탈각되고 삶과 죽음을 양자택일해야 하는 한계상황에서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 펼쳐진다.
못내 아쉬운 점은 이렇게 대여섯 번의 자맥질이 이뤄질 때마다 인간 존재의 본질에 더 깊숙이 침잠한다는 느낌이 잘 안 든다는 점이다. 더 깊이 들어간다는 느낌보다 비슷한 깊이에서 첨벙거린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는 깊이 있는 캐릭터 구축이 이뤄지지 않아서다. 극의 전반부를 이끌던 잠수정 정장(김학수)과 기관장(기도균), 공작조장(김주헌)이 총격전으로 갑작스럽게 숨진 뒤 후반부는 전반부에 조역에 머물던 부기관장(박완규)과 무전병(손우재, 김광영)이 극 전면에 나선다.
얼핏 신선한 반전처럼 느껴지지만 이로 인해 전반부와 후반부의 연속성이 끊어져 극적인 깊이를 조성하지 못했다. 여러 배역으로 분산된 캐릭터를 압축하거나 후반부 주역들의 캐릭터를 좀 더 입체적으로 구축한다면 매력적 작품으로 재탄생할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월 17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정보소극장. 02-814-1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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