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joy]강릉대관령 ‘솔향길’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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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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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 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 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속에 털어 넣는다, 화주(火酒)…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 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것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김선우의 ‘대관령 옛길’에서>》

솔솔 솔냄새… 대굴대굴 굴러도… 걷고 걸으리


겨울대관령에 오를 땐 자꾸만 목이 탄다. 눈꽃을 따먹는다. 눈 꽃잎은 입속에서 금세 비수가 된다. 아프게 목구멍을 찌른다. 가슴속이 시려온다. 아리다. 뱃속이 뜨겁다. 눈꽃은 푸른 솔가지 끝에 매달려 파르르 떤다. 바람이 울 때마다 하얀 꽃잎들이 우르르 떼지어 난다.

대관령(해발 832m)에 숫눈이 쌓였다. 적막강산. 아득히 멀리 펼쳐진 눈밭과 둥근 언덕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릉의 경계선이 아슴아슴하다. 뼈만 남은 흑갈색 나무들이 추사체처럼 꿈틀거린다. 우뚝우뚝 커다란 바람개비들이 거친 바람을 개킨다. 광풍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곡차곡 둥글게 말려 켜켜로 잠을 잔다. 대관령바람개비들은 그렇게 전기를 만들며 부르르! 부르르! 진저리를 친다.

강릉사람들은 대관령을 ‘대굴령’이라고 부른다. ‘대굴대굴 구르며’ 오르내리는 고개라는 뜻이다. 그만큼 가파르다. 넘어지고 자빠지기 일쑤였다. 강릉사람들에게 대관령 너머는 ‘아련한 꿈’이었다. 서울 동대문에서 강릉까지 이어지는 관동대로. 그 끝엔 한양도성이 있었다. 강릉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한양 땅에 목을 맸다. 시선은 늘 대관령 너머를 향했다. 등 뒤의 동해바다는 성에 차지 않았다. 바다는 묵묵히 혼자서 놀았다. 파도는 그 이마에 몇 겹씩 주름을 만들며 애를 태웠다.

미친 바람과 성난 파도는 언제나 그 대관령 너머 한양으로부터 밀려왔다. 한양이 울면 강릉은 대성통곡했다. 한양이 웃으면 강릉은 춤추고 노래했다. 서울 사람들은 ‘동대문 밖 강릉’이라며 치켜세웠다. ‘동대문 밖으로 나와서는 강릉이 가장 살기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강원관찰사 송강 정철(1536∼1593)이 관동별곡에서 ‘풍속이 좋고, 충신 효자 열녀가 가득하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양사람의 눈으로 본 것이었다.

대관령 뒷덜미(평창 쪽)부근엔 국사성황당이 있다. 강릉수호신 범일국사와 대관령산신 김유신을 모신 사당이다. 범일국사는 ‘처녀가 샘물을 마시고 아이를 잉태해 열 석 달 만에 낳았다’는 신라말 강릉 출신 고승. 그는 847년 강릉 학산리에 굴산사를 창건(현재 옛터만 남음)했고, 죽어선 강릉수호신이 되었다. 국사성황당은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를 모신 서울 인왕산 국사당보다 훨씬 오래됐다. 전국 무당들이 빼놓지 않는 굿 순례 코스. 꽹과리 장구 징 등 굿 장단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국사당과 마찬가지로 사용료를 내면 누구나 굿을 할 수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강릉단오제는 음력 사월보름날 대관령산신(김유신 사당)에게 제사를 지내고, 강릉수호신인 국사성황신 범일국사를 산 아래 강릉으로 모셔오는 것에서 시작된다. 음력 오월칠일 범일국사 성황신을 ‘다시 대관령으로 모셔다드리는 제사(送神祭)’가 끝나면 단오제는 막을 내린다.

그렇다. 대관령은 강릉사람들의 얼이요 정신이다. 대관령금강소나무는 강릉사람들의 뼈다. 대관령고원은 강릉사람들의 살이다. 대관령의 억센 바람은 강릉사람들의 넋이다. 동해바다 푸른 바닷물은 강릉사람들의 맑고 뜨거운 피다.

강릉은 소나무 동네다. 어딜 가든 소나무 천지다. 소나무도 하나같이 허리가 꼿꼿하다. 구부정한 소나무가 별로 없다. 훤칠한 귀공자 스타일이다. 구불텅구불텅 경주왕릉 소나무들과 대조적이다. 경주왕릉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왕릉 쪽으로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다. 소나무는 워낙 햇빛을 좋아한다. 잔디뿐인 왕릉엔 다른 나무들이 거의 없어 햇볕이 잘 든다. 소나무가 그 쪽으로 머리를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강릉대관령엔 커다란 왕릉이 거의 없다. 강릉 김씨 시조 명주군왕릉 정도가 고작이다. 게다가 비뚤배뚤 자라다간 강풍에 동강나기 십상이다. 위로 쭉쭉 두 팔을 벌려야 햇볕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다.

대관령 일대에는 14만 그루의 붉은 살갗 금강소나무가 자란다. 수백 년 된 늙은 소나무도 많다. 1530년에 세워진 강릉 심상진가옥 정자 해운정(海雲亭)의 일백여 노송들. 선교장 열화당 뒤쪽의 우렁우렁 관운장 소나무들, 강릉고 교정의 ‘쭉쭉빵빵’ 금강송들, 명주군왕릉의 거북등딱지 낙락장송들, 허난설헌(1563∼1589) 허균(1569∼1618) 집 부근의 호호탕탕 용비늘 노송들, 경포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푸른 말갈기 솔잎의 금강송들, 강문∼강릉항(3km) 해안 솔밭의 해맑은 파릇파릇 해송들….

‘금강송 숲 속에서 금강송 바라보며/금강송 숲 속에서 금강송 명상하며/일주일만 지냈으면!/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그냥 일주일만 서성거려 보았으면!/아니 허리 꼿꼿하게 직립해 보았으면!/이 몸도 금강송이 될 수 있는지./나무 대관령 금강송 보살님./나무 관세음 금강송 보살님’ <박희진의 ‘다시 대관령휴양림에서’ 부분>

강릉대관령 숲길에선 늘 솔향기가 솔솔 난다. 그래서 모두 ‘솔향길’이다. 강릉 솔향길 1코스를 걷는다. 옛 대관령휴게소(상행선)∼산림청등산로 입구∼양떼목장∼국사성황당∼반정∼주막∼하제민원∼원우리재∼대관령박물관에 이르는 약 9km 길이다.

단오제 때 국사성황신을 모시고 강릉으로 내려가는 옛길(성황당∼반정 1.83km+반정∼박물관 6.04km=7.87km)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옛길은 1511년 1월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오솔길을 넓혀 만든 것. 나무꾼이나 소금장수들이 넘던 샛길이 보통사람들도 넘을 수 있는 큰 길이 된 것이다. 신사임당(1504∼1551)이 어린 율곡 이이(1536∼1584)의 손을 잡고 넘었고, 한양과거 길에 나선 강릉선비들도 푸른 꿈을 안고 이 고개를 넘었다. 결국 신사임당과 아들 율곡은 한양에서 이름을 날렸고, 나란히 대한민국 오만 원권, 오천 원권 지폐의 초상화로 남았다.

솔향길 1코스 옛길 윗부분은 반통형이다. 원통을 반 자른 것처럼 ‘U자’형 길이다. 구불구불 쇠썰매 봅슬레이 홈통경기장 같다. 황갈색 솔잎과 나뭇잎이 버무려진 눈밭. 푹푹 빠지고 미끄럽다. 아이젠과 지팡이는 필수. 가끔 솔방울이 싸르륵 밟혀 달콤하다. 쌓인 눈가루가 다시 살아나 하루살이처럼 어지럽다. 양떼목장 언덕에 “잉∼잉∼” 눈들의 아우성 가득하다. 경포호는 민물과 바닷물이 몸을 섞는 곳이다. 맹물과 짠물이 만나 만리장성을 쌓는다. 맹물은 간간해지고, 짠물은 슴슴해진다. 강릉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경포호를 닮았다. 모든 것을 넉넉하게 아우른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경포호 한 바퀴(4.3km)를 돌며 숨을 고른다. 경포호는 강릉의 눈동자이다. 즐거울 땐 옹달샘이 되고, 가슴 아플 땐 눈물샘이 된다.

솔향길 4코스는 경포호를 따라 한 바퀴 도는 ‘경포8경길’이다. 역시 대부분 동네 뒷동산 솔밭길이다. 막내 딸 손잡고 도란도란 걷는 길이다. 누렁이 앞세우고 ‘시느미(느릿느릿)’ 걷는 코스다. 뒷짐 지고 콧노래 부르는 길이다. 아늑하고 고즈넉하다.

바닥엔 ‘소갈비(솔가리)’가 수북이 깔렸다. 어르신들도 ‘한창 때 무릎’으로 걸을 수 있다. 김치만둣국으로 이름난 남향막국수(033-644-1124) 같은 밥집도 만난다. 매콤하고 진한 사골육수 맛이 그만이다. 가끔 아무 솔밭에나 드러누워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본다. 어디선가 하모니카 소리가 들린다. “쏴아! 쏴아!” 대숲바람 소리가 반주를 넣는다. 어릴 적 ‘그 눈물 없던 시절’을 떠올린다.

경포호 서쪽 마루엔 정자 경포대가 있다. 두둥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는다. 미끄덩! 서산너머로 붉은 해를 보낸다. 이윽고 눈썹달이 경포대 늙은 소나무가지에 걸린다. 달이 하나 둘…모두 다섯 개다. 나뭇가지에 걸린 달, 호수에 어른거리는 달, 바다에 잠긴 달, 술잔 속의 달, 마주앉은 벗님네 눈 속의 달. 달기둥(月柱), 달 탑(月塔), 달 물결(月波)….

경포대 달빛을 쐬고 자란 사람들은 어디에 있건 모두 강릉사람들이다. 이들이 모여 ‘솔냄새 솔솔 나는’ 솔향길을 만들고 있다. 2011년까지 모두 8개 코스. 대관령 옛길, 대관령 등길, 경포대로 가는 길, 경포8경길, 해변길, 헌화로길, 강릉단오길, 사임당 길이 그것이다. 신사임당은 서른일곱(1541년)에 강릉을 떠났다. 한양 수진방(청진동)에 있던 시집 살림살이를 맡기 위해서였다. 강릉엔 늙은 어머니만 홀로 남았다.

‘산 첩첩 내 고향 여기서 천리/꿈속에도 오로지 고향생각뿐/한송정 언덕 위에 외로이 뜬 달/경포대 앞에서 한바탕 바람/갈매기는 모래톱에 헤어졌다 모이고/고깃배는 바다 위를 오고 가겠지/언제쯤 강릉길 다시 밟아가/색동옷 입고 어머니 곁에서 바느질 할꼬’

<사임당 ‘사친(思親)’에서>

김화성 기자 mars@donga.com

▼300칸 선교장… 조선 시인 학자들의 사랑방▼


선교장(船橋莊·전경 사진)엔 강릉사람들의 마음이 오롯이 배어있다. 선교장은 9만9000㎡(약 3만 평) 대지에 본채 120칸 등 총 300칸에 이르는 대저택. 1703년 조선 영조 때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에 의해 지어졌다. 배다리라는 뜻의 ‘선교’는 옛날 경포호수가 이 집 앞에까지 이어져 배를 타고 오간 데서 유래된 것.

주인은 주로 열화당(悅話堂)에서 거처하며 손님을 맞았다. 손님들은 행랑채의 23개 방에서 묵었으며 그 방들은 열화당을 빙 둘러싸고 있다. 열화당은 중국 도연명(365∼427)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말로 ‘기쁘게 정담을 나누는 곳’이라는 뜻.

선교장에는 조선팔도의 내로라하는 시인묵객 정치인 학자 등이 묵고 갔다. 식객들로 늘 북적였다. 선교장은 금강산 구경 베이스캠프로 유명했다. 가기 전에 이곳에 들러 금강산 가는 길에 대한 각종 정보를 얻었고, 돌아올 땐 이야기 보따리와 쌓인 여독을 풀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몇 달씩 묵었다. 숙식비용은 모두 공짜였고,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았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문화사랑방이나 같았다.

대저택 선교장 대문은 뜻밖에도 서민들 집 대문처럼 소박하다. 위압감이 전혀 없다. 손님들이 편안하게 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대문(月下門) 양쪽 기둥엔 한시가 붙어 있다.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잠들고, 한밤 나그네는 이 문을 두드린다(鳥宿池邊樹 僧鼓月下門)’. 피곤한 길손은 그 누구든 괜찮으니 들어와 쉬었다 가라는 뜻이다.

선교장 전주 이씨 가문은 만석꾼이었지만 대대로 베풀었다. ‘베풀지 않으면 하늘이 베풀 때가 올 것이고, 그때는 큰 재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게 선교장의 정신. 그래서일까. 1894년 동학혁명 때도 선교장은 아무런 탈이 없었다.

|트레킹 정보|

◇교통 ▽승용차=서울∼영동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진부∼강릉 ▽고속버스=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동서울터미널 강릉행 ▽비행기=서울 김포국제공항∼양양국제공항

◇먹을거리 △초당(草堂)순두부는 강릉의 대표적인 명물. 초당은 풍운아 허균(1569∼1618)의 아버지 허엽(1517∼1580)의 호. 허엽이 강릉부사 시절 아이디어를 내 ‘바닷물을 간수로 써서 만든 순두부’가 초당순두부다. 천일염은 동해바다에선 나지 않아 귀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간수 염도가 낮아 맛이 슴슴하고 부드럽다. 허엽 일가가 살았던 초당동엔 수십 개의 순두부집이 있다. 토담순두부(033-652-0336), 동화가든순두부(033-652-9885), 고부순두부(033-653-7271), 400년집초당순두부(033-644-3516). △물회국수도 일품이다. 펄펄 뛰는 생선을 즉시 회쳐서 먹는 것이 물회. 양념이 잘 스며들어 회가 붉은 기운을 띠었을 때 먹어야 맛있다. 국수를 넣고 마지막에 밥까지 비벼 먹으면 꿀맛. 우럭 미역국으로 매운 입맛을 다독여 주는 것도 잊지 말 것. 물회국수전문(옛성도횟집 033-653-7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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