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온 세상이 눈에 뒤덮여 백설 천지를 이루었지만 세상은 눈으로 인해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출근을 못 하고 전동차가 고장 나고 고속도로와 국도가 주차장으로 변하고, 고속철과 항공기 운항이 중단되었습니다. 교통사고와 추락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눈이 재난이 되어 온 세상의 질서 체계가 하루아침에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단지 눈이 내렸을 뿐인데 어째서 사람 사는 세상이 이렇게 북새통이 되는 걸까요.
어린 시절, 눈이 많이 내려도 세상은 고요했습니다. 깊은 밤, 귀를 기울이면 사락사락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마을은 고요했습니다. 그래서 자박자박 누군가 눈을 밟고 가는 발자국 소리가 선명하게 뇌리에 각인되었습니다. 그렇게 눈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있었고, 그렇게 눈을 밟으며 집을 떠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인 정지용의 ‘향수’가 그려내는 곳,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베개를 돋워 고이시는 곳’에서 우리는 살았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눈은 풍년의 약속이자 기원이었습니다. 마당과 사람 다니는 길을 제외하고 들과 산의 눈은 봄이 될 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빙기가 되면 눈과 얼음 녹은 물이 사방의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고 그곳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냉이와 달래가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눈에 뒤덮인 마을 풍경, 그것이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겨울의 기억이자 추억입니다. 눈 내리는 밤, 화롯가에 모여 앉아 군밤이나 고구마를 구우며 듣던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이야기가 우리를 키웠고 또한 꿈꾸게 했던 것입니다.
이제 눈이 내리면 우리는 출근을 걱정하고 운전을 걱정합니다. 눈이 내린다는 설렘보다 눈으로 인해 귀찮아질 일을 먼저 떠올립니다. 예전의 눈은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대상이었지만 이제 그런 자연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자연 경관을 이루던 곳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고속도로와 국도가 닦이고 관광단지가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온 세상을 점령해 눈은 발붙일 곳이 없어졌습니다.
눈을 눈으로 감상하지 못하는 현실은 서정의 고갈을 반영합니다. 서정이 고갈된 세상은 무미건조하고 삭막합니다. 우리 마음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처럼 견고하고 거칠어져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온정을 잃게 됩니다. 먼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던 시절, 깊은 밤 눈을 뜨고 듣던 솔바람 소리, 사락사락 어둠 속으로 눈 쌓이는 소리를 되살려 보세요. 그 시절과 지금, 우리가 눈을 얼마나 다르게 대하고 있는지 절로 깨치게 됩니다. 30년 전에 들었던 가수 송창식의 ‘밤눈’이라는 노래를 듣고 싶은 날입니다.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가만히 눈 감고 귀 기울이면/까마득히 먼 데서 눈 맞는 소리/흰 벌판 언덕에 눈 쌓이는 소리/당신은 못 듣는가, 저 흐느낌 소리/흰 벌판 언덕에 내 우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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