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의 활화산 파카야. 3000m 고지를 걸어 올라갔다. 붉은 용처럼 꿈틀대며 흘러내리는 용암을 마주 보며 촬영을 시작했다. ‘보따리’ ‘바늘여인’ 시리즈로 알려진 영상설치작가 김수자 씨(53). 느릿하고 차분한 말투로 그때를 회상한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불덩이가 돌로, 재로, 뜨거운 열기로 스러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가 연약한 생명체, 숨쉬는 생명체를 밟고 살고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땅, 불, 물, 공기는 독립적인 것 같지만 독립적이지 않다. 한 요소는 반드시 다른 요소에 의지하며 생성되고 변화한다. 물 안에 불이 있고 불 안에 바람이 있다. 자연의 유기성, 연기성 속에 인간의 삶, 생로병사의 순환이 내재해 있음을 느꼈다.”
해외에서 주목받는 대표적 한국 작가로 손꼽히는 김 씨의 작업이 3월 28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아틀리에 에르메스(02-544-7722)에서 열리는 ‘지수화풍: Earth, Water, Fire, Air’전에서 선보이고 있다. 10년 만에 한국에서 갖는 개인전.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 뉴욕에 거주하며 세계를 무대로 작업해 온 작가 근황이 궁금했던 이들에게 더없이 반가운 전시다.
7개의 독립된 채널에서 ‘공기의 불’ ‘불의 공기’ ‘땅의 불’ ‘물의 공기’ 등의 제목 아래 5∼9분짜리 영상작품이 펼쳐진다. 활화산과 같은 시간 화산 위 하늘을 촬영한 작품을 비롯해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 란사로테 섬의 자연 풍경을 낮, 오후, 밤 등 다른 시간대로 만날 수 있다. 시뻘건 용암이 흐르고, 바닷가 절벽을 세차게 후려치는 파도 속에 무지개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푸른 하늘에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이 보인다. 익숙한 풍경 같지만 물이 산맥처럼 보이고, 불에서 땅의 모습이 드러나는 등 작가는 오묘한 이미지로 강렬한 인상을 빚어낸다. “나는 대상이나 물질을 변형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작가는 아니다. 자연과 인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면서 새로운 관점과 맥락을 열어 보이는 일을 한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에는 ‘논두잉(Non-doing)’의 개념이 자리한다. 꽁꽁 싸맨 이불 보따리를 트럭에 싣고 이동하는 삶을 담은 ‘보따리’, 작가의 몸이 상징적 바늘이 되어 세계 곳곳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바늘여인’뿐 아니라 자연을 파고든 이번 작품에서도 작가의 직접 개입은 없다. 대신 그의 직관과 우연이 계획과 논리에 우선한다. 자신의 내적 에너지의 흐름을 믿고 그 안에 자신을 맡길 뿐이다.
지난해 러시아 모스크바와 일본 후쿠오카 등 숱한 비엔날레와 전시에 초청받은 작가. 서구에선 인간의 근원을 묻는 철학적 사유를 그들과 전혀 다르게 풀어낸 그에게 열광한다. 동시에 그의 작업은 머리로 이해하지 않아도 우리 시각을 확장하고 감성을 열어주는 미덕을 품고 있다.
“많은 설명이 필요 없기에 사람들이 내 작업에 감성적으로 공감하는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예술을 하는 일 자체는 철학하는 행위와 분리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근원, 자신의 실존, 자신과 세계에 관한 질문들이니까.”
현대인의 떠도는 삶에 대한 연민과 성찰을 담은 ‘보따리’와 ‘바늘여인’은 걸음을 멈춘 것일까.
“결정적 완성작 같은 끝은 내 작업에 없다. 한 작업은 다음 작업을 위한 질문이다. 한 작업이 다음 작업으로 증식되고 명료해지는 과정의 연속이다. 모든 작업은 과정이자 진행형이다. 결정적 모멘트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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