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73>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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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12일 03시 00분


《“비행기의 발명, 항공기의 발달은 이제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케 하고 있습니다. 이 문명의 진전, 이기의 발달에 선각하는 자는 흥하고 낙오하는 자는 망합니다.” (안창남이 고국방문비행에서 뿌린 전단 내용)―1922년 12월 11일자 동아일보》

1922년 5만명 집결
‘금강호’ 탄 안창남
서울상공 첫 비행


한국인 최초로 한반도 하늘을 날았던 안창남.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국인 최초로 한반도 하늘을 날았던 안창남. 동아일보 자료 사진
시인 이상화(1901∼1943)는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며 식민지 조선의 설움을 노래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우리는 들판만 빼앗긴 것이 아니었다. 하늘도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최초로 한반도 하늘을 비행기로 날았던 사람은 일본 해군 중위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였다. 1913년 8월 29일. 경술국치 3주년에 맞춰 일본의 기계문명을 과시하는 무력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후 미국과 이탈리아의 비행사들도 방문해 곡예비행을 펼쳤다. 매번 입이 떡 벌어지는 구경거리였지만 조선의 영공(領空)을 외국 비행사들에 내준 현실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그즈음 일본에서 안창남(1900∼1930)이 1등 비행사가 되고, 일본 비행협회 주최 우편비행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조선인 천재 비행사의 탄생소식이 어찌나 기뻤던지 “떳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란 노래가 유행할 정도였다.

1921년 안창남을 초청해 한국인 최초로 한반도의 하늘을 날게 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안창남 후원회가 조직되고, 비행기 구입을 위한 2만 원 모금운동이 벌어졌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동아일보사 주최로 드디어 안창남 고국방문 비행이 성사됐다.

1922년 12월 10일 서울 여의도 간이비행장. 찬바람이 쌩쌩 부는 날씨에도 구경꾼 5만여 명이 몰렸다. 안창남의 비행기 ‘금강호’가 여의도 간이비행장을 이륙해 하늘로 치솟자 구경꾼들의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안창남은 이듬해 1월 잡지 ‘개벽’에 첫 비행의 감격을 토로했다.

“경성의 한울! 비행장에서 1100m 이상 높직이 뜨니까 벌써 경성은 들여다 보였습니다. 뒤이어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이었습니다…. 그냥 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를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가서 한바퀴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내 뜻과 내 몸을 보아 주었을는지….”

안창남의 첫 비행은 평면에 머물던 한국인의 시각을 3차원으로 확대했다. 2008년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연 박사가 “우주에서 본 한반도는 하나였다”고 말한 것과 비견되는 감동이었다. 동아일보 사설은 “안창남군의 1회 비행은 기다(幾多)의 비행가를 산출할 것이며, 무수한 과학자를 표현하여 20세기 과학세계에 만장의 기함을 토하게 할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이후 안창남은 일본에서 비행사로서 출세의 길을 버리고 중국으로 망명해 군벌 염석산 아래서 중국인과 한국인 비행사를 키워내는 교관으로 일하다가 31세의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일찍이 “비행기로 국내 민심을 격발하고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니라”고 한 말처럼 안창남은 과학기술을 통한 독립운동을 펼친 선구자였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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