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는 같은 말이 다른 편에 재차 기록된 예가 간혹 있다. ‘衛靈公(위령공)’에서 공자는 ‘덕을 좋아하기를 여색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했는데 이 말은 이미 ‘子罕(자한)’에도 나왔다.
‘공자세가’와 ‘사기’에 따르면, 공자는 57세 때 衛(위)나라로 갔다가 靈公(영공)이 絶色(절색)의 부인 南子(남자)와 함께 수레를 타고 시가를 돌아다닐 때 그 뒷자리에 타야만 했다. 공자는 마지못해 수레를 함께 탔지만 靈公과 南子의 행태를 추하게 여겼으므로 뒤에 이 말을 하면서 한탄한 듯하다. ‘衛靈公’의 이 章(장)에는 已矣乎의 세 글자가 더 있다. 공자는 도덕을 열렬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이 말을 다시 한 듯하다.
已矣乎는 절망의 詠歎(영탄)이되,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약간의 기대감을 남겨둔 표현이다. 已矣夫는 완전히 절망했을 때의 영탄이다. 好德의 德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도덕을 말한다. 덕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好色의 色은 美色의 여인이다. 德과 色은 韻(운)이 같아, 서로 짝을 이루었다.
유학 가운데 성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道心(도심)과 人心(인심)으로 나누어 道心을 기르고 人心을 억제하라고 가르친다. 정약용도 인간의 마음을 도심과 인심으로 나누어 보는 관점을 계승하여 德은 도심이 좋아하고 色은 인심이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데 정약용은 도심은 항상 나약하므로 성실하기 어렵고 인심은 항상 치열하므로 거짓이 없다고 덧붙였다. 여색을 좋아하는 일이 인심의 본성임을 직시했다. 그렇다면 덕을 좋아하는 일은 인간 본성에 따른 것이 아니기에 저절로 덕을 좋아하게 될 수가 없다. 好德은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요청되는 도덕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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