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감관저… 日軍사령관저… 잊혀진 ‘치욕의 현장’

  • 동아닷컴
  • 입력 2010년 1월 15일 03시 00분


서울 거리 무심코 지나치는 일제강점기 흔적들

《올해는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해다. 1910년 8월 29일을 전후로 일제가 우리 역사에 남긴 흔적은 고스란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현재의 시간을 우주에서 뚝 떨어진 별도의 시대인 것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근대의 역사적 현장을 찾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에게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일제강점기 역사의 흔적’ 7곳을 들었다. 최근 이 소장이 출간한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하늘재)과 그 이전의 ‘테라우치 총독, 조선의 꽃이 되다’,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에서 고른 것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역사기행도 가능하다.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 기능을 이용해 찾아갈 수 있도록 주소지를 함께 싣는다.》

청계천 관수교, 남산 총독관저∼창덕궁 빠른 통행 위해 건설
대한제국 황실 마지막 근위대 머물던 곳, 정부중앙청사로


①표지석 하나 없는 경술국치 현장=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 장소는 당시 통감관저였다. 서울 남산 유스호스텔(옛 남산 안기부 청사 본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다목적광장(중구 예장동 2-1)이 그곳이다. 그러나 아픈 역사를 상기시켜 줄 표지석 하나 없다. ②주차장이 된 대관정(大觀亭)=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의 대각선 건너편에 있는 주차장은 일제강점기 조선주차군 일본군사령관저로 사용된 ‘대관정’이 있던 곳이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의 집이었다가 대한제국 궁내부가 사들여 게스트 하우스로 사용했다. 러일전쟁 직후에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 好道) 일본군사령관이 이곳을 차지해 한국 병탄을 노리는 본거지로 사용했다. 특히 을사늑약 때는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머물며 배후조종을 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 중구 소공동 112-9.

③을사늑약이 맺어진 수옥헌(漱玉軒·중명전)=을사늑약(1905년)의 현장인 수옥헌은 1901년 황실도서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1904년 덕수궁의 화재로 고종의 집무실로 쓰일 때 이토 히로부미가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일제강점기 서양인들을 위한 ‘서울구락부(외국인구락부)’로 사용됐다. 1906년 중명전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중구 정동 1-11.

④황제와 총독의 연결통로 관수교(觀水橋)=청계천에 있는 다리로 1918년에 준공했다. 순종황제가 있던 창덕궁과 그 아래 남쪽에 있던 총독관저를 일직선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일제가 신설한 다리다. 이 다리의 준공 이후 조선총독이 창덕궁을 찾아가는 일은 간편해졌을지 모르나, 반대로 총독관저를 찾아가야 했던 순종황제의 입장에서는 고난과 굴종의 길이었을 것이다. 서울 종로구 관수동 98 인근.

⑤외환은행 본점 터에 있었던 조선귀족회관=한일강제병합의 ‘최대 수혜자’는 조선 귀족의 작위를 받았던 자들이다. 이들 옛 한국의 고관대작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1912년에 생기는데 바로 ‘조선귀족회관’이었다. 지금은 이 자리에 외환은행 본점의 주차빌딩이 있다. 서울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내려 명동의 번화가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서울 중구 을지로2가 181.

⑥조선보병대가 머물렀던 정부중앙청사=이곳은 원래 조선시대부터 삼군부가 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궁궐 수비와 황실 경호를 위해 간신히 남겨진 근위보병대(대대병력 규모)가 있던 곳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도 이들은 ‘조선보병대’라는 이름으로 유지됐다. 그러나 허울뿐인 조선 군대로서 이들은 차츰 그 규모가 줄어들면서 고종과 순종황제의 서거 이후 1931년 경제 불황의 타격으로 조용히 해산됐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55.

⑦독립문 편액은 이완용의 글씨=독립문의 편액을 쓴 주인공은 그동안 몇 가지 논란이 제기된 바가 있었으나 ‘이완용’의 글씨라는 설이 유력하다.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 실린 연재물에도 관련 기록이 나온다. 일반인들은 독립문의 ‘독립’을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오해하는데 사실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독립’이라는 편액이 버젓이 걸린 독립문이 무사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일제가 독립문을 수리했다는 사실도 이를 말해 준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바로잡습니다]15일 A24면 ‘무심코 지나치는 일제강점기 흔적들’
◇15일 A24면 ‘무심코 지나치는 일제강점기 흔적들’ 기사에서 일본군 사령관의 이름은 ‘하세가 요시미치’가 아니라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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