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암흑기 속에서 민족의 뿌리와 정통성을 잃지 않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민족학교 설립, 국어 국문학연구뿐 아니라 신채호 정인보 등 학자들의 역사연구도 활발했다. 한민족의 시조인 국조(國祖) 단군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이에 대해 일제는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개천절이나 어천절(御天節·단군이 하늘로 올라간 3월 15일)마다 ‘학생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주입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조선인 교사들의 소식이 지면에 게재됐다.
동아일보가 창간 열흘 뒤인 1920년 4월 11일에 사고(社告)를 내고 최초의 사업으로 선택한 것은 단군의 초상화 현상공모였다. 1921년 4월 22일의 단군어천기념(檀君御天紀念) 행사 안내기사, 1926년 3월부터 7월까지 이뤄진 육당 최남선의 단군 학술 논문 장기 연재에서도 단군의 유훈과 건국이념을 강조함으로써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단군 유적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탐사와 순례가 이어졌다. “반만년문화의 창조자시오 이천삼백만 조선인의 육과 령의 원천이시며 역대조선민족의 추앙의 대상이신 단군성조의 유적… 아울어 신공성훈을 전조선 동포와 함께… 하옵기위하야 본사 사회부 현진건(玄鎭健)을 특파하기로 하야 금일 태백산, 평양, 강동, 강서, 구월산…등지를 향하야 출발케 합니다.” (1932년 7월 9일 동아일보)
단군과 함께 역사적 복원과 재평가의 대상이 됐던 인물 중 하나가 고구려시대 무신 을지문덕이었다. 수적 열세 속에서도 뛰어난 지략과 기개로 외적의 침입에서 나라를 구했던 자랑스러운 역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을 고무시켰다. 1935년 10월 1일 동아일보는 을지문덕 장군의 묘를 돌아보는 기행문 ‘수군백만을 격퇴한 을지문덕묘를 찾아서’를 상중하 3회에 걸쳐 싣고 그의 포부와 위업을 되짚었다.
조만식 최윤옥 김병연 김성업 등 평양의 지식인들과 유지들은 평남 강서군 저차면 현암산에 있는 을지문덕 묘를 보수하기 위한 모임을 조직했다. 1936년 5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우리 을지장군 묘산 보수키로 적신단합’이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옛날 조선에 빛나든 우리의 을지문덕 장군의 무훈을 영구히 기념하고 그 유래를 길이 길이 보존하자는 의논이 한번 평양유지 인사들 사이에 근기 시작되어 지난 이십이일 오후 팔시 삼십오분부터 부내섬암리 평양기독청년회관에서 을지문덕묘산수보회 발기회가 열리었다.”
최근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뿐 아니라 고조선사까지 자국의 역사로 포함시키려 하며 논란을 빚고 있다. 잊혀져가고 있는 우리 상고사에 대한 각계의 더 큰 관심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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