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日帝가 손대기 전 서울의 모습은…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16일 03시 00분


1900년대 초 서울의 운종가. 동대문에서 돈의문을 지나는 서울의 중심축으로 시전이 모인 상업의 중심지였다. 사진 제공 푸른역사
1900년대 초 서울의 운종가. 동대문에서 돈의문을 지나는 서울의 중심축으로 시전이 모인 상업의 중심지였다. 사진 제공 푸른역사
◇ 사라진 서울/강명관 엮음/456쪽·2만3000원·푸른역사

“남산은 일명 종남(終南), 또는 목멱(木覓)이다. ‘목’은 남, ‘멱’은 산악(山岳)의 음(音)을 취한 것이니, 역시 남산이란 뜻이다. 그 높이는 835영척이고, 가장 높은 봉우리는 잠두(蠶頭)요…꼭대기에는 국사당(國師堂)이 있고, 또 그 부근에는 봉수대의 옛 자취가 있다.”(별건곤 1929년 10월호)

“북산 밑을 북촌, 남산 밑을 남촌, 낙산 근처를 동촌, 서소문 내외를 서촌, 수표교 어름을 중촌이라고 했다. 동서남북의 매 촌에는 양반이 살되 북촌에는 문반, 남촌에는 무반이 살았으며 또 같은 문반의 양반이로되 서촌에는 서인이 살았으며…그 후 다시 나누어져 서촌은 소론, 북촌은 노론, 남촌은 남인이 살았다.”(개벽 1924년 6월호)

‘조선의 뒷골목 풍경’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등의 저서를 통해 우리의 옛 생활을 살펴온 저자가 1910∼1945년 신문과 잡지에 실린 서울에 관한 글들을 풀어 엮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경복궁의 주요 건축물이 헐리고, 총독부와 조선신궁 등 근대적 건축물이 들어서는 등 일제에 의해 서울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시 신문과 잡지는 서울의 옛 모습을 기록하고, 달라지는 변화상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서울에 관한 특집 기사를 많이 실었다.

별건곤은 1929년 10월호에서 서울의 팔대문과 궁궐의 다섯 문을 고찰하면서 숭례문에 대해 “경성 팔대문 중 최대의 건물로 웅려장대함이 그 짝이 없다”고 기록했다. 별건곤 같은 호와 잡지 민성 1949년 11월호에는 서울의 각 지명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소개하는 글이 실렸다. 별건곤에 따르면 소격동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던 소격서(昭格署)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계동은 원래 계산동으로 계산(桂山)에서, 오성부원군(이항복)의 출생지인 필운동은 오성의 소호(小號)인 필운(弼雲)에서 유래했다.

민성은 화개동(花開洞)에서 이름이 바뀐 화동에 대해 “김옥균 김굉집 서광범 등 근대인물의 집중지”이라며 “그뿐 아니라 우리 민족문화운동 또는 민족해방운동사상에 뚜렷한 존재인 동아일보가 이 화동에서 커왔다”고 전했다.

저자는 동아일보가 1924년 6월 25일∼8월 16일 50회에 걸쳐 연재한 ‘경성백승’의 내용을 소개하며 “당시 각 동리의 사람들이 조선시대의 서울을 증언한 매우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의 각 동리 주민들로부터 투고를 받아 서울의 주요 명승지 100곳을 사진과 함께 소개한 연재물이다.

과거 북두칠성에 제사를 지내던 삼청동의 성제우물, 청국에 간 사신이 들여와 심은 재동의 백송, 나무를 사고팔던 돈의동의 나무장, 애주가들이 단골로 찾았던 청진동의 내외주점들, 기후를 예측하던 낙원동의 측후소 등이 지면에 실렸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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